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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Oct 08. 2022

그럼에도 환승연애2를 보는 이유

감정의 평등을 원하는 사람들, 그안에서 찾을 수 있는 안전에 대한 열망

지난주 주말 Y와 함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봤다. 영문 제목은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인데, 참 한글 제목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사는 율리에라는 여성이 성장하면서, 또 누군가와 사랑하고 헤어지면서 겪는 다양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율리에라는 입체적인 페미니스트 여성의 캐릭터가 흥미롭긴 했지만, (씨네21 김혜리 기자님도 지적했지만) 성장서사라기엔 주변 여성과의 관계를 그리지 않는 등 명확한 한계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최악의 인간'이라는 호칭을 붙이기에는 율리에는 너무 평범하게 나빴다.


오히려 나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는 제목을 붙이기에는 환승연애2 16화가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4년간 세 번씩이나 헤어지면서도 미련을 갖고 있는 나연-희두의 말싸움은 그야말로 '최악', '지리멸렬'이라는 표현이 적당했기 때문이다. 왜 싸우는지도, 무얼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시작된 싸움은 속칭 '찐텐'이라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멋지고 영특한 사람들도 가장 내밀한, 혹은 내밀했던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분명 나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환승연애가 잘 보여줬다.



금요일 밤마다 나와 Y의 루틴은 퇴근 후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환승연애를 보는 것이다. 무려 X , '전 남자친구' '전 여자친구'와 함께하는 연애 리얼리티라는, 얼핏 보면 '인간 심리 실험실'과도 같아보이는 이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는 당연히 X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다양하고도 독특한 파장 때문이다. 


단순히 마음에 드는 사람을 놓고 경쟁하는 기존의 연애 리얼리티 구도와는 다르게, 나를 가장 잘 알고 있고 심지어 '재결합'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는 X의 존재는 시청자로 하여금 복합적인 감정 이입을 하게 만든다. 일종의 '이성애 판타지'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특수한 '관계성'에 대한 스스로를 감정 이입시키고 호불호를 표현하도록 이끈다.


워낙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이라 출연자 개인에 대한 응원만큼이나 비방도 극심한데, 아무래도 나는 그들보다 조금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런가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도 있다. 


물론 시청하는 도중에는 원빈의 어리숙한 집착, 희두의 부질없는 자존심과 종종 위험해보이는 상대에 대한 '통제', 규민의 방어적이고 선뜻 나아가지 못하는 태도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환승연애'라는 공간 자체가 자신의 가장 나약하고 미숙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어쩌면 출연자가 그러길 원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유치하고 한심한, 말하면서 나쁜 성격을 마구 드러내는 모습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훨씬 나빴을 수도 있다. 특히 20대 때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연애 과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컨트롤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때문에 자신의 결함이나 망가진 모습을 드러낼 것을 각오하고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을 둘러싼 열띤 갑론을박에는 '감정의 평등'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는 만큼 상대방도 마음을 주는, 감정의 크기와 깊이가 비슷한 관계, 갑을이 따로 없는 상호신뢰의 관계를 원하다보니, 을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지지가, 갑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비난이 쏟아진다. 


사실 '감정의 평등'이 실질적으로 이성애 연애에서의 평등한 지위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을의 연애'에 대한 강력한 반감이 보인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끌려다니거나 주도권을 빼앗긴 연애를 할 경우에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해 '정신적 착취'나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환승연애와 그것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두달 반 가까이 보면서, 연애 리얼리티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습을 반추하게 되는가 하면, 대중이 원하는 이성연애의 올바른 상과 그에 대한 젠더적 함의까지도 고민하게 된다. 환승연애 같은 연애 리얼리티가 이성애규범성을 강화하고 특정한 남성성을 표준으로 부각시킨다는 점은 여전히 고민되는 지점이지만, 그럼에도 여기서도 작은 균열의 조짐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으며 열심히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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