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행정사 김서록 흑역사 - 외국계 중소기업 B사 재직 에피소드(1)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길하다. 항상 좋은 일만 있다면 모를까, 우리는 크고 작은 사고를 겪게 되니까. '좋은 게 좋다'던 사람은 돌발상황이 발생하는 순간 '나에게 좋은 게 좋다'는 본심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런 부류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바라는 대로 전부 이뤄지는 건 아니라서, 혼자 행정사 사무소를 운영하며 꼭 챙기는 일 중 하나가 고객과의 대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통화를 했다면 전부 녹음을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아 서면 자료를 남겨둔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료를 다시 살피며 스스로의 개선점을 찾을 수 있다. 확실히 업무에 도움이 된다. 처음부터 이런 습관이 있었던 건 아닌데, 그 배경에는 두 번째 회사였던 B사가 있다.
백수가 된 사회초년생이 0으로 수렴해 가는 통장잔고를 눈앞에 마주했을 때 평점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게 그딴 취급을 한 걸 후회하게 할 거라며, 실력을 키우는 데 시간을 쓰리라 다짐했건만, 돈이 뭐라고, 몇 개월 안 가 채용사이트를 기웃거리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때는 대기업 등 콧대 높은 기업의 공채시즌은 끝난 뒤였다. 채용 사이트에서는 월급 2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회사들이 한창 명함을 들이밀며 행세 중이었다. 왠지 다달이 이백은 받아야지 싶어 그 급여기준에 근접한 회사를 찾아 이력서를 냈다. 이력서를 낸다고 상황이 즉각 바뀌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그 행위 자체가 위안이 되었다.
심란하던 중에 면접 제안이 왔다. 한국지사의 설립을 준비하던 외국계 기업이었는데, 채용사이트에 공개해 둔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해왔단다. 이런 방식이 생경해서 사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알아보니 해외에서 인지도 있는 회사길래 안심하고 면접에 응했다. 면접에서 특별한 점은 없었고 곧 출근일자를 받게 되었다. 한국지사가 이제 막 설립하는 단계라길래 한시라도 빨리 출근을 해야 할 것만 같았는데,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해야 한다고 면접에서 말했던 게 감안이 되었는지 몇 주 정도 텀이 주어졌다. 나는 출근 전 주에 이사를 하겠다고 전달했고, 지사장은 본사에 컨퍼런스 콜을 해서 채용 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드디어 볕 들 날이 오는 건가?
B사는 특이한 구석이 있는 회사였다. 좀 더 정확하게는 지사장이란 사람이 별났다. 실무는 과장이 담당한다고 했으면서 지사장이 꽤 자주, 내게 직접 연락을 했다. 전화를 해서는 이것 보내달라, 저것 보내달라는 식으로 요구했다. 채용 당시에도 안 낸 영문 이력서와 영문 자소서를 갑자기 작성해서 보내라던지, 업무 행정 능력 평가가 누락되었다며 뜬금없이 MS 오피스 능력 테스트를 진행하겠다는 식이었다. 대부분 밤에 연락을 했는데 제출은 ‘다음 날 오전 근무 개시 전’까지 하라고 했다. 마치 채용이 확정되지 않은 지원자를 대하는 느낌을 받았고,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채용에 변동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절차상 누락된 게 있었다고 본사에서 지적하길래 서류 보완차원에서 하는 거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계약서는 정식 출근날에 쓰면 될 것 같고요."
지사장과 통화를 마친 후 B사 차장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며 회사에 관해 물었다. 옛 회사의 사수와 닮은 느낌을 풍기던 그는 내 말을 듣더니 놀란 눈치였다.
"네? 그런 걸 시키셨다고요? 저 지금 서록씨한테 처음 들어요. 진짜 왜 그러시지……"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내게 너무 걱정 말라며, 그냥 말 그대로 요식행위일 거라며 안심시켰다.
"회사 관련해서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봐요.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울게요."
괜한 생각 말기로 하고 지사장이 보냈다는 메일을 열었다. 거래처 명칭이나 판매수량 같은 데이터가 실제 데이터처럼 적힌 자료였다. 새벽 3시까지 자료를 정리해서 보냈다. 지사장은 그 후 별다른 말이나 연락이 없었다.
출근하기로 한 날짜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이사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단칸방에서 무슨 짐이 얼마나 나오겠냐고 생각했건만, 짐을 싸다 보니 양이 제법 되었다. 그대로 용달차에 실었다. 서울을 떠나니까 같은 돈으로 더 좋은 공간에 살 수 있게 되어 (Buy가 아니라 Live) 특별히 물건을 버릴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원룸이긴 했어도, 건물 거주자의 모든 발소리나 대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서울 반지하집을 드디어 탈출한 데 의의가 있었다. 새 집에는 엘리베이터도 있었고 무엇보다 신축이어서 새 출발을 앞둔 내 상황과 제법 잘 어울렸다. 때 탄 흔적 없이 은빛 광이 도는 새 집 문고리를 당겨 짐을 풀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삿짐이 새 자리를 찾아갈 무렵이었다. 지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또 뭘 해달라고 하려나? 3초 정도 휴대폰을 응시하다가 이내 전화를 받아 이사한 소식을 알렸다.
"아… 벌써요?"
반응 뭐지?
"출근 날짜가 코앞이니까요."
내 말에 지사장은 마지못해 동의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쩌죠. 본사에서 갑작스럽게 잡포지션을 없애는 바람에 채용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일까.
해당 에피소드는 분량이 다소 길어 다음 주에 나눠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