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연극, 공연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이해가 담겨있는 글이 아닌 그저 취미생활의 기록입니다.
성별의 구분을 넘어서, 젠더프리 캐스팅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면 같은 배역을 남자배우와 여자배우가 각각 소화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원작이 있는 작품들 중에서도 원래는 남성이었던 역할을 여성 배우가 한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죠. 이것을 바로 '젠더프리 캐스팅'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시도들이 더욱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성 배우가 하는 햄릿도 볼 수 있고, 여성 배우가 하는 살리에리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했던 작품들 중에서 생각해 봐도 <데미안>, <해적>, <아마데우스> 등등 수많은 작품들이 떠오르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 뮤지컬 <해적>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한 배우가 두 가지 역할을 연기합니다! 뮤지컬 <해적>은 두 명의 배우가 각각 두 개의 역할을 맡아서 진행됩니다. 한 배우가 잭과 메리, 다른 배우가 루이스와 앤을 연기하죠. 여기서 잭과 루이스는 남자, 앤과 메리는 여자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작품은 젠더프리! 캐스팅을 하여 남성 배우 두 명이 하는 버전과 여성 배우 두 명이 하는 버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각각 두 가지 성별을 연기해야 하니 어떤 버전을 보느냐에 따라 느낌도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실제로는 여성 배우들이 하는 것만 보았는데 영상을 통해서 남자 배우들이 같은 넘버를 소화하는 걸 보니까 다른 극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이런 젠더프리 극들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골라보셔도 좋고, 두 가지 버전을 다 보면 더 좋겠죠?
해적의 황금시대 이야기, 뮤지컬 <해적>
이 작품은 해적이라는 제목처럼 해적들이 보물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험을 소재로 한 소년만화나 소설처럼 아주 유쾌하고 신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극 자체도 재밌고 넘버들도 신나고 명랑한 노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이 주고받는 유쾌한 티키타카와 애드리브를 보는 재미도 굉장히 쏠쏠합니다.
주인공 루이스는 해적의 아들인데요. 해적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했던 해적 '캡틴' 잭이 찾아옵니다. 잭은 루이스의 아버지가 남긴 보물지도를 찾고 있는데요. 루이스는 이 기회를 통해 바다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잭을 설득(...보다는 협박에 가깝게...)해서 같이 해적선을 타고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해적선에는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각종 식량과 무기, 그리고 총잡이도 필요하죠.
로비에서 잭의 수칙들도 볼 수 있습니다 잭은 물자를 채우기 위해 들른 항구의 술집에서 술집의 주인이자, 총잡이인 앤을 만나게 됩니다. 앤은 잭에게 총쏘기 내기를 제안하고 자신이 이기면 배에 태워달라고 이야기하죠. 그렇게 둘의 내기가 시작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나오는 두 개의 넘버인 '스텔라마리스'와 '질투하라'를 아주 좋아하는데요.(이 부분만 봐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두 사람이 내기하는 모습을 노래하는 '스텔라마리스'에서 앤이 '별을 쏘겠다'면서 천장을 향해 총을 쏘는데요. 이때 마치 별이 폭발하듯 위에서 빛이 쏟아지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진 장면입니다.
그렇게 앤이 배에 합류하게 되고, 이후 다른 해적선과의 전투에서 메리라는 검투사가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보물을 찾아가는 그들의 모험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언젠가 해적이 다시 하게 된다면 그때 만나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놀라운 건 역시 배우들의 연기인데요. 잭과 메리, 루이스와 앤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옷만 갈아입고 나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배우들을 볼 수 있는데요. 좀 전에 봤던 그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리고 잭과 루이스, 잭과 앤, 루이스와 메리, 앤과 메리가 각각 만났을 때 보여주는 케미의 차이에서도 색다른 재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두 배우가 계속해서 역할을 바꾸다 보니 중간에 두 배우가 동시에 역할을 전환하는 장면에서 '인터미션'이라는 넘버가 나옵니다. 실제 1막과 2막을 나누어 쉬는 인터미션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노래인데요. 이것도 다른 작품에서는 본 적 없는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넘버들이 전부 다 좋습니다. 앞서 말한 두 개의 넘버 말고도 '아닐 리 없다', '졸리로저', '우리 모두의, 기억나지 않는 꿈' 등등 뭐 하나 빼놓기 어려울 정도로 다 좋습니다. 극을 보지 않으셨더라도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한 번 들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젠더를 넘어, 한계를 넘어서
해적에 나오는 앤이나 메리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억압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생아인 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름조차 남길 수 없는 사람이었고, 메리는 죽은 오빠를 대신해 남자인 척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총잡이와 검투사로 해적이 되어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 스스로를 찾게 됩니다.
젠더프리는 것도 결국 이처럼 역할에서 성별을 구분을 두지 않고, 극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물로서 인정받는 과정이 아닐까요. 물론 젠더프리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뮤지컬도 연극도 하나의 예술이고, 예술은 다양한 해석과 상상의 영역이니까 이 또한 그러한 시도로 볼 수도 있고, 시대에 따른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정답은 알 수 없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 말하자면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롭고 신선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뻔하지 않은 극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창작자들도, 배우들도 계속해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공연을 하고 있는 작품 중에는 뮤지컬 <수레바퀴 아래서>가 젠더프리 극으로 볼 수 있는데요. 원작인 헤르만 헤서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남자아이들의 이야기인데 뮤지컬은 모두 여성 배우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작과는 느낌이 매우 다르면서도 오히려 이렇게 해서 더 좋다는 느낌까지 주고 있습니다. 뻔하지 않은 해석은 관객들에게 역시나 큰 기쁨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젠더프리 극들을 찾아보시는 것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