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영업 도전기(2): 어느 실패한 세일즈맨의 귀가

이중생활자의 꿈

서른 살,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다


서른 살의 첫날, 나는 새로운 전장의 출발선에 서 있었다. 뒤늦게 출발한 내게 호텔리어로서의 정착이 제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보험 설계사로서의 도전은 세상의 속도를 앞질러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보통의 각오로는 이 거친 파도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식 영업 전, 한 달간의 교육 기간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쥔 것과 같은 긴장의 나날이었다. 내 모든 신경 세포는 영업이 시작되는 첫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급할수록 정도를 가야 한다.' '편법의 함정은 반드시 자기가 판 구덩이로 돌아온다.’ 선배들의 충고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박혔다. 최소한 이곳에서 10년은 버텨내야 성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 올빼미처럼 눈을 부릅뜨고 교육에 집중했다. 롱런(Long-run)을 위한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 그것은 내게 일종의 수행과도 같았다.


영업 첫 달, 실전의 막이 올랐다. 계획은 꼼꼼하게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시작은 지인들이었다. 내가 전하는 보험의 진정한 가치를 믿어줄 사람들, 그들에게 진심을 전하며 시장을 확대해 나가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첫 달은 순조로웠다. 친구와 선배들은 내가 전달하는 의미에 동의했고, 내미는 청약서에 기꺼이 서명했으며, 자신들의 소중한 인연들을 내 가망고객 파일 속으로 연결해 주었다.


한 달 뒤, 내 손에 쥐어진 수당은 호텔 월급의 세 배에 달했다. 그것은 내게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남들의 속도에 뒤처져 전전긍긍하던 내가 타인의 시간을 앞질러 나가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시작이긴 했지만 이렇게만 일이 진행된다면 내 인생을 바꿨던 책 <OOO을 벤치마킹하라>의 주인공이 나로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지나친 상상력이 눈을 가렸던 걸까. 그때는 보지 못했다. 달콤한 성공의 감상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을.


끊어진 흐름, 단돈 20만 원의 충격


영업 두 번째 달에 접어들자마자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지인의 따뜻한 울타리를 벗어나 소개받은 낯선 이들을 상대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유대가 없는 이들은 만남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어렵사리 마주 앉아도 상담의 온도는 차갑기만 했다. 당연히 계약이 있을 리 만무했다. 기세 좋던 흐름은 월초부터 툭 끊겨 버렸다.


나와 함께 시작했던 동료들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고비였지만, 이토록 일찍, 이토록 잔인하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성공의 화려한 조명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그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이 업계에서 승승장구하는 이들보다 소리 없이 스러져가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 그들 역시 인생을 걸고 이곳에 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벽을 넘지 못한 채 길을 잃고 있었다. 그 막막한 대열 속에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달이 끝나고 통장에 찍힌 금액은 단돈 20만 원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인생을 건 도전의 대가로는 너무나 초라한 숫자였다. 호텔에서의 영업은 영업도 아니었다는 자조가 터져 나왔다. 그곳에서 가졌던 자신감이 얼마나 얄팍했던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실패를 안고 퇴근하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행로였다.


실패한 어느 세일즈맨의 귀가

퇴근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무표정 속에서 나는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도 나의 고군분투에 관심이 없었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은 아내였다. 아무것도 없던 옥탑방 시절부터 나를 믿고 응원해 준 사람. 호텔에서 겨우 안정을 찾아가나 싶더니, 굳이 가시밭길을 택해 그녀 앞에서 다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찢어 놓았다.


훗날 '아카펠라 그룹 아카시아' 활동을 하며 이 시기의 심정을 가사로 옮긴 적이 있다. 제목은 <어느 세일즈맨의 귀가>.


"오늘도 깨진다 마음이 아프다 / 지칠 대로 지쳐 몸이 아프다 / 쉽지 않다는 세상 살이지만 / 끝이 보이지 않는 나의 길 / 이렇게 약해지면 안 되는 걸 아는데 / 아프고 지쳐도 안 되는 걸 아는데 / 기댈 곳 없는 이 길 모퉁이에 / 나도 모르게 떠오른 가족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거리의 정지등 불빛이 두 눈에 번져 어지러웠다. 다정히 손잡은 연인들과 바쁘게 스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가로등 불빛처럼 차갑고 무심했다. 보험회사 입사 몇 달 만에 모든 꿈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내 인생엔 늘 퇴로가 없었고, 이번이야말로 갈 곳 없는 벼랑 끝이었다.


성공은 '최후의 1피트(One Foot)' 앞에 있다는 업계의 오랜 격언을 주문처럼 외웠다.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설 때, 딱 한 걸음만 더 내딛는 자가 보물을 발견한다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아니, 믿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선문답 같은 선배의 말


어느 날이었다. 지점에서 오랜 기간 동안 압도적인 실적을 올리며 선두를 달리던 대선배가 나를 불렀다. 평소 존경의 눈길로만 바라보던, 인사 외엔 이야기조차 나눈 적이 없던 선배였다.


“어이, 홍원표 씨.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선배와 마주 앉았다. 공기는 무거웠고 내 마음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선배는 나의 초췌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나지막이 입을 뗐다.


“원표 씨, 나 아무한테나 이런 말 안 하는데... 원표 씨가 워낙 성실하게 하니까 내가 특별히 하는 말이야. 지금 많이 힘들지? 근데 말이야, 영업에서 성공과 실패,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백지장 한 장 차이야. 그거 느

낄 때까지만 그만두지 마. 그냥 지금처럼 계속해. 알았지? 내 말 명심해야 돼.”


그게 전부였다. 이 난관을 돌파할 신묘한 전략도, 기가 막힌 고객 리스트를 건네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계속하라'는 지극히 평범한 권유. 하지만 업계 정점에 서 있는 선배의 짧은 이야기는 캄캄했던 마음에 작은 빛 하나를 던져 주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틀린 건 아닌가 보구나.'


선배와의 대화 이후에도 기적 같은 반전은 곧장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거절당하고, 여전히 소득 없는 무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이전보다 조금은 더 단단해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이 길의 끝을 먼저 본 사람의 증언이 내 등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가방을 고쳐 메고 차가운 거리로 나섰다. 최후의 1피트를 향한 고독한 행군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선배가 얘기했던 백지장 한 장을 만나게 되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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