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영업 도전기(3): 백지장 한 장의 정체

이중생활자의 꿈

거듭되는 실패, 바닥난 고객


실패가 거듭되는 날들이 이어졌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 터널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마다 번뜩이는 기지와 순발력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곤 한다. 하지만 현실의 나에겐 극적인 구원도, 화려한 역전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요행을 바랄 수는 없었다. 나는 매일 아침 무너지는 마음을 일으켜 세웠다. 세상의 온갖 성공 격언들을 부적처럼 몸에 붙이고 되뇌며 고민하고, 전화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결과는 늘 없었다. 열정은 마모되어 갔고, 자신감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를 지탱하던 정신적 무장은 이제 작은 충격에도 흔들릴 만큼 위태로웠다.


만날 사람의 목록이 바닥을 드러내던 어느 날이었다. 실적 없는 설계사가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았다. 동료들의 활기찬 대화 소리를 피해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와 멀지 않은 곳에서 근무하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내 얼굴에 가득한 수심을 읽은 친구가 전화번호 하나를 건넸다.


“정 만날 사람이 없으면 이 친구라도 한번 만나봐. 근데, 아마 별 소득은 없을 거야. 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보험을 꽤 많이 갖고 있다고 들었거든.”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내게 새로운 번호는 마른 우물 바닥에서 언뜻 비치는 물빛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친구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상대는 의외로 순조롭게 약속을 수락했다.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진 내 가슴에 다시금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이미 보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보험을 좋아하는 사람 아닐까?’


거절의 성벽, 그리고 내려놓음


약속 당일, 나는 약속 장소인 카페에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이번 만남만은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나를 짓눌렀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니, 우리 보험의 장점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쏟아부어야 했다. 나는 가상의 고객을 앞에 둔 채, 머릿속으로 수십 번이나 프레젠테이션의 대사를 되뇌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한 여성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선한 인상을 가진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품에 안긴 커다란 파일 뭉치를 본 순간 나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혼자 들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그 두꺼운 파일들은 한눈에 봐도 기존에 가입한 보험증권들이었다.


그것은 성벽이었다. 저 정도 양의 보험을 가입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단 1밀리미터도 없다는 것과 같았다. 인사도 나누기 전에 나는 이번 게임에서도 패배했음을 직감했다.


“안녕하세요, 홍원표 씨 맞으시죠? 제가 연락은 받았는데.. 보시다시피 이미 보험을 너무 많이 들어서 더 가입할 여력이 없네요. 죄송해요.”


그녀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던진 첫마디는 명백한 사형선고였다. 그녀가 품고 온 증권들은 더 이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방패였다. 혀뿌리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평소 같았으면 준비한 멘트를 쏟아부었겠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내가 준비한 말들을 조용히 거둬들였다.


“와, 벌써 이렇게 준비를 많이 하셨어요! 정말 꼼꼼한 분이신가 봐요. 괜찮습니다. 가입 안 하셔도 돼요.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내 대답에는 완연한 백기 투항의 의사가 담겨 있었다. 비즈니스의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지자, 그 자리는 묘한 평온함으로 채워졌다. 어차피 끝난 게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지자, 순수한 호기심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이렇게 보험을 많이 가입하셨어요?"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나의 질문은 영업적인 전략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홍원표가 한 인간에게 던진 진심 어린 궁금증이었다. 젊은 나이에 자신의 수입 중 상당 부분을 보험료로 지출하면서까지 이토록 많은 증권을 쌓아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질문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방어적인 태도가 누그러지더니, 쉽게 꺼내지 못했을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저희 집안에 암 환자가 너무 많아요. 친가도 외가도.. 암은 가족력이 무섭다면서요? 저도 남들보다 위험할 거라는 걱정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어차피 가입할 거라면 한 푼이라도 보험료가 쌀 때 해두고 싶었죠. 제 수입에 이만큼 보험료 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요.”


안타까운 가족사였다. 암이라는 질병이 주는 공포 앞에 홀로 서 있었을 그녀의 고독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녀가 건넨 증권들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전문가로서의 호기심이라기보다, 그녀를 그토록 괴롭히던 공포가 이 종이 뭉치들로 정말 제거되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증권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그 수많은 증권은 전부 ‘손해보험사’의 상품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의 영역이 명확히 나뉘어 있었다. 암과 같은 일반 질병은 생명보험사가 주력이었고, 손해보험사는 사고와 재해 보장에 특화되어 있었다.


가족력이 걱정되어 보험에 매달렸던 그녀의 증권들 속에서, 정작 ‘암’에 대한 보장은 미미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부담스러운 보험료를 내면서도,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으로부터는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암 때문에 준비하신 보험들이라면, 정작 암 보장이 너무 적어 보여요. 목적에 맞지 않는 보험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요.”


최대한 충격이 덜하도록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예상치 못한 사실을 마주한 그녀의 눈에 당황함이 가득했다.


"에이, 설마요. 가입한 보험이 이렇게 많고, 한 달에 내는 돈이 이만큼이나 되는데요."


나는 그녀가 가입한 보험의 현황을 천천히, 상세하게 설명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표정은 굳어갔다. 결국 상황을 납득한 그녀가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낸 돈이 얼만데.. 그럼 이제 저 어떻게 해야 되죠? 좀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요?"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나를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돕기 위해서’ 진심으로 머리를 싸매고 설계를 고민했다.


결국 나는 그녀의 보험료 부담은 줄이면서도, 암에 대한 보장은 몇 배로 키운 대체안을 제안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낸 돈이 아까워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내 진심을 읽고 청약서에 서명했다. 오랜 정적을 깨고 터진, 입사 후 지인이 아닌 타인과 맺은 나의 ‘첫 번째 진짜 계약’이었다.


껍데기를 깨고 나온 작은 새의 날갯짓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계약에 성공했다는 기쁨 너머로 뒤통수를 세게 맞는 듯한 깨달음이 나를 덮쳤다. 지점 선배가 말했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백지장 한 장’의 정체가 선명해졌다.


지금까지의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을 말할까’만 준비했지, ‘무엇을 들을까’는 고민하지 않았다. 고객을 만나는 순간부터 내 이야기를 소나기처럼 쏟아부으며 상대를 설득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번 계약은 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왜?"라는 질문 하나를 던졌을 뿐이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아! 영업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귀로 하는 것이구나!’


말할 것을 준비하지 말고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듣기 위해 정교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 보험 입문교육에서 들었던 이 평범해 보이는 진리가 보험 영업의 거대한 성벽을 허무는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의 ‘경청’이야말로 상대의 마음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고객을 만나면 묻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시간보다 고객이 말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고객의 삶을 묻고, 그들의 두려움과 소망을 경청하자 거짓말처럼 계약이 이어졌다.


나는 알 속에 갇혀 있던 새였다.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안에서는 깨기 힘든 껍데기 속의 새. 이제 그 단단한 백지장의 벽을 깨고 안간힘을 다해 깨뜨리고 나오고 있었다. 날기 위한 부화였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