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 교환학생 일기
어제 브뤼셀에 도착했다.
9시간 45분 동안 날아서 한국에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9시간 45분. 학기가 끝나고 고생한 나를 위해서 자기 보상 차원으로 매일 9시간에서 10시간 정도 잠을 잤다. 실은 학기 동안 그렇게 뭔갈 해내지도 못했는데... 한국에서 내가 잠을 자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로 이 먼 곳까지 이동했다는 사실에 잠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들이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갈 동안 나는 폭이 1미터도 되지 않은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4시간을 보내고 브뤼셀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기내식을 먹자마자 잠이 들어버렸고, 브뤼셀로 오는 4시간은 사라졌다. 한국에서 이륙한 시간은 2월 6일 오후 한 시, 브뤼셀에 도착한 시간은 2월 6일 오후 10시 30분. 내가 도착한 순간에 한국 사람들은 이미 2월 7일의 새벽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을 조금만 내 맘대로 해석한다면, 한국의 사람들은 항상 나보다 미래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룸메이트가 나를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한국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 룸메이트가 인도 사람이라고 말하며 사진을 보여주면 다들 "와 진짜 인도인처럼 생겼네"라고 말했다. 공항에서 만난 모습도 전형적인 인도인이었다. 내 생애 첫 인도인과의 만남은 너무나 어색했다. 나는 영어 회화가 익숙하지 않은데, 이 친구가 영어를 인도어처럼 말하는 탓에 더 알아듣기 어려웠다. card를 까르드라고 말하니까 나로서는 carld?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산책하듯이 시작한 우리 대화에는 많은 허들이 생겨서 장애물 달리기가 되어 버렸다. 어제 우리는 짐을 풀고 곧 잠들어버렸다. 여기 시간으로 새벽 2시쯤이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집에 도착한 지는 두 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였는데 내가 자기 전에 샤워를 한다니까 조금 신기한 눈으로 봤다. 시험 기간에 친구가 공부 안 하고 노래방 간다고 말할 때 내 눈이 그런 신기한 눈이었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하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눈빛.
어제가 대충 이렇게 지나가고, 오늘은 여기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우선 까르푸에 갔다. 까르푸는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오늘 나는 10년 만에 까르푸에 왔다. 왕십리에 살면서는 필요한 것들을 쿠팡이나 이마트에서 샀다. 쿠팡이나 이마트는 웬만한 모든 걸 다 담고 있어서 돈만 있으면 나에게 모든 걸 줬다.
모든 게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카르푸를 찾아갔다. 구글 지도도 이곳을 되게 큰 매장으로 인정해주는 것 같았는데, 내 기준엔 다이소보다 더 사갈 게 없었다. 먹을 것들은 정말 많았다. 내 기억에 예전에 아버지 차를 타고 까르푸에 들어갈 때마다 주차장 입구에 오이나 당근, 배추 등으로 사람 얼굴을 만들어놓은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진짜 이렇게 먹을 것만 많으면 이걸로 사람 얼굴을 충분히 만들어 봄 직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는 생필품은 거의 없었다. 이불이 하나 있었는데, 내일 이케아에 가보고 더 싸고 좋은 걸 살 예정이다.
물이랑 먹을 것들을 잔뜩 사서 내 방에 옮겨두고 조금 있다가 다시 필요한 것들을 사러 나갔다. 이번에는 이곳 관리인의 조언을 들어서 HEMA라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근데 룸메이트가 C&A와 PRIMARKET인가를 가면 이불을 살 수 있다고 그곳에 가자고 했다. 근데 아무리 봐도 여기는 벨기에판 스파오인데... 결국 베개를 하나 건지긴 했다. 룸메이트는 왜 이곳에 이불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친구 말로는 독일의 C&A 매장엔 이불이 있단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HEMA에 갔고, 나는 수건이랑 머그컵을 샀다. 하루 종일 아주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데 산 것은 겨우 오늘 저녁거리와 오렌지, 물, 수건 세장과 머그컵. 너무나 사고 싶은 헤어드라이기, 욕실 실내화, 이불, 주방 용품들은 구경도 못했다.
한국에서는 이마트 한 곳에 40분만 머물러도 모두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왜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이곳엔 종합마트 같은 개념이 없나 보다. 식재료는 까르푸, 인테리어 용품은 HEMA, 옷은 C&A... 이런 식이다. 그걸 다 합하면 이마트가 될 텐데. 이마트 같은 장소가 없는 이유를 모르겠다.
많은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3학년 1학기를 교환학생으로서 브뤼셀의 KU LEUVEN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으로 대신한다. 6개월 동안 한국의 내 또래들은 높은 학점을 따려고 안간힘을 쓰고 서포터스, 기자단, 봉사활동, 학원, 인턴 등 각자 커리어에 명백히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해내고 있을 것인데 그에 비해 내가 여기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 사치스럽다. 여유롭지 않음에도 사치를 부리는 이유는 돈이 별로 없는데 비싼 폴로 옷을 사 입어 보는 것과 비슷하다. '도대체 뭐가 다를까?'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는 것.
'헬조선'이라는 한국과 '살고 싶다'는 유럽이 뭐가 다를까? 혹시 다른 점은 별로 없고 그저 유럽의 좋은 면만 한국에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멀리서 보면 살고 싶고 가까이서 보면 헬조선인 건 아닐까?
왕십리 자취방에 앉아서 책이나 노트북을 보는 것으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낯선 사람들과 알 수 없는 글자들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여기서 답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튼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그렇다. 근데 하나도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살 지 막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