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엔 작은 반디불이도 밝게 보입니다. 의경 복무 중 새벽에 일어나 근무지로 가던 길에 라디오에서 이 말을 들은 순간 아이슬란드는 이미 밝은 보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경 복무를 마치고, 대학도, 대학원도 마치고, 첫 직장도 마친 뒤, 찾아온 시간에 아이슬란드에 가게 된 건 당연한 일인 듯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아이슬란드를 생각해보면, 거길 다녀왔던 게 맞나? 꿈이었나? 싶습니다. 일주일동안 온천에 몸을 담으며 북극해를 바라보기도 하고, 끝이 없어 보이게 뻗은 도로를 달리면서 큰 산과 절벽과 바다를 보았고, 이제 큰 산이나 절벽은 익숙해졌다 싶을 때쯤 크고 작은 폭포들이 나와 절경이 이어졌고, 은은히 저녁 노을 빛을 받은 빙하와 꽃밭도 보았고, 빙하 위에서 귀엽게 꿈틀거리는 물개도 보았고, 10시쯤 되면 슬쩍 햇빛이 따뜻한 색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다시 쨍한 아침 빛이 되는 백야도 즐겼습니다. 미친듯이 부는 바람에 새가 뒤집히는 것도 보고, 따뜻한 물엔 유황냄새가 나서 씻어도 씻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햄버거 한 세트에 3만원씩 하는 살인적인 물가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스나이스펠스넬스반도 어딘가. 토르2 라그나로크에서 오딘이 죽는 장면의 장소이랑 비슷했습니다.
스나이스펠스네스 키르큐펠 근처
스나이스펠스넬스
불과 얼음의 땅
아이슬란드는 불과 얼음의 땅이라고도 부릅니다.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이라 특이한 지형을 갖고 있는데 그 땅을 눈과 빙하가 또 다시 신비롭게 만들어내었기에 생긴 별명입니다. 그래서인지 푸른 들판 옆에 가파른 산이 솟아 있고, 그 반대편엔 가파른 절벽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이 많습니다. 어디든 빙하가 녹은 물이 폭포와 냇가되어 흐릅니다.
게이시르 지역의 온천, 가스가 차오르면서 5~10분마다 한번씩 물이 솟아오릅니다. 너무 신기해서 계속 보았어요.
게이시르 지역의 온천
굴포스, 수량이 너무 많고 물도 세서 가까이 가면 자동 샤워를 하게 되었습니다
셀야란드포스 폭포
폭포 뒤로 들어갈 수 있었던 셀야란드포스 폭포
Mulaglijufur 협곡. 정말 영화 '반지의 제왕'의 '엘론드'가 나올 것 같았던 곳
Mulaglijufur 협곡
Mulaglijufur 협곡에서 멀리 보였던 빙하
빙하
아이슬란드의 모든 것이 좋았지만, 빙하는 그 중에서도 특별했습니다. 빙하를 보면서 내가 이걸 보러 아이슬란드에 왔구나, 생각했습니다.
노을 빛이 살짝 입혀지고, 발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는 곳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랫동안 빙하를 보았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에는 이렇게 시간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눈표범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던 사진작가가 마침내 눈표범을 만났는데도 사진을 찍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진 작가는 아름다운 걸 보면 어떤 때에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 순간에 머물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영화를 보던 때에는 이 장면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 자체도 크게 재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빙하를 보다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이 영화가, 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대사가 말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요한 이곳에는 바람도 한점 불지 않았고, 발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없었습니다. 다만 빙하가 녹아 부서지면 작은 얼음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거나, 건물이 부서지는 것처럼 큰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 속에서 영원히 있어도 좋을 것만 같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빙하 옆 언덕에는 보라색 꽃이 해가 지는 쪽으로 쭉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로 옆엔 빙하가, 그 옆엔 예쁜 꽃밭이라니… 세상에 이런 곳이 있구나, 내가 살면서 이런 걸 보는구나 감탄했습니다. 무슨 복이 있어서 내가 이런 걸 보는지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꽃 이름 : 루피너스
꽃밭 옆에 빙하 말이 되나요..
아이슬란드에서의 여행은 요쿨살론(Jökulsárlón)에서 보트를 타고 빙하를 가까이에서 구경하는 투어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보트를 타고 뭍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스란드에서 갖게 된 기억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좋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아니라 언제나 나에게 힘이 되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다보면 또 언젠가 힘들고 답답한 일이 생길 것이 분명합니다. 행복한 일도 있고 그저 그런 날도 있고, 아무 일이 없지만 우울하고 지루한 날도 있는 것이 일상이니까요.
그런데 그때마다 아이슬란드를 생각하면 힘이 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가보았고 어떤 사진을 들이밀어도 부족한 경이로운 풍경을 보면서 행복했다는 걸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너무 일상이 혼탁하면 언제든 이곳으로 와서 며칠 보내면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일상에 어려움이 있어도 전보다 더 단단하게 버티고 조금 더 용기 내서 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슬란드는 7년 전 그날부터 마음속에 있었고, 드디어 다녀왔지만, 그럼에도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자리를 잡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꺼내 볼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자주 가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멀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내 기억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서인 듯 합니다.
물론, 다시 찾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그때는 낮에는 하얀 눈으로 덮힌 들과 산을 보고 밤에는 그 눈에 비친 오로라를 보면서 따뜻한 차나 마시면서 또 옛날 생각을 하고, 지금 나는 어떤 지, 지난번과 비교해서 내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생각하면서 며칠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