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파밸리 결혼식, 팟타이, 그리고 삶은계란
얼음을 꽉 채운 레모네이드 한 잔 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은 오후였다. 운 좋게 차지한 창가 자리에 앉아 레모네이드만 들이키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가게 앞에서 주차로 한참 동안 씨름 중이던 백발 노인이 차키를 뽑고 밖으로 나오고나서야 음식이 나왔다. 잘 볶은 땅콩을 가득 뿌린 팟타이, 진한 코코넛향의 그린 커리, 피쉬소스로 볶은 가지볶음이 2인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오랜 기다림을 까맣게 잊게 해주는 맛이었다.
우리는 테이블 옆 유모차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잠시 잊고 한상 차려진 태국요리를 음미했다. 미국에 오고나서 거의 처음으로 우리는 ‘맛있다’는 말을 연발했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우리 부부는 세 접시에 담긴 음식에 들어간 재료 하나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올리며 감상을 얘기했다. ‘그린 커리에 들어간 이름 모를 버섯의 식감이 독특하다’ 라든지, ‘가지는 한 번 찌고 튀긴건지, 튀기고 찐건지 궁금하다’ 라든지의 얘기들.
어느새 접시를 다 비우고 미국 시골마을에 태국 왕실 일가의 공간을 재현하려는듯 화려하면서도 고상한 인테리어에 대한 수다가 끝이 날 무렵 계산서를 받아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외식다운 외식을 한 날이었다. 아마 아이가 태어난 이후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 아니었을까. 아이는 여전히 긴 낮잠을 자고 있었다.
2박 3일간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북부를 종단하는 여정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여행 첫날 바로 이 소노마의 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을 때다. 비록 낮 영업을 하는 식당이 많지 않아 집에서 삶아온 계란과 호밀빵을 아이의 점심으로 떼우게해 미안했다. 그러나 그런 죄책감도 금새 증발해버릴 만큼 이날 점심식사가 내게 준 기쁨의 여운은 꽤 컸다.
우리는 이날 오전 4시에 야반도주하듯 짐을 가득 싣고 자는 아이를 차에 태워 서부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보다 약간 위쪽에 있는 나파밸리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700km가 넘는 장거리를 여행하는 데 가장 큰 걱정거리는 우리집 두살 아이의 컨디션이었다. 답답한 카시트에 한 시간 넘게 앉아만 있어도 칭얼대는 아이와 함께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덜 힘든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고민한 끝에 우리는 새벽에 출발했고 캄캄한 밤 여전히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LA 시내를 지나 지평선 위 일렁이는 일출을 조용히 지켜보며 여정을 시작했다. 다행히 아이는 잘 자주었다. 첫날 숙소가 있는 소노마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엄청나게 칭얼대기 시작했지만 8시간 운행 중 한 시간이면 절을 해도 모자랄 만큼 감사한 시간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무한반복으로 읽어주기도 하고, 과일을 손에 쥐어주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면서 어느새 화창한 대낮의 소노마에 도착했다.
소노마는 나파밸리에서 50분 정도 떨어진 산타로사의 작은 마을이다. 미국 최대 와인산지로 유명한 나파밸리는 일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아 숙박비가 다른 도시의 2~3배는 넘는다. 소노마 자체로는 큰 관광지는 아니지만 나파밸리와 가깝고 호텔과 리조트가 곳곳에 있어 관광객들이 대안으로 찾는 마을이다.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호텔 앞 시내에 유서깊은 식당과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많아 주변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소노마의 소박하면서도 잔잔한 활기가 마음에 들어 다음 날 오전에도 소노마 시내에 머무르며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오전 10시. 내리쬐는 햇볕 속 서늘한 공기를 맨살로 느끼며 거리를 걸었다. 여행 중이란 걸 가장 실감하는 순간 중 하나는 하루밤을 보낸 뒤 여행지 주변을 동네산책하듯 여유롭게 거닐 때이다. 나에게 이 시간은 유명 명소를 방문했을 때보다 더 가치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브런치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천천히 음미하며 산책을 했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이는 식당에서 제공한 하이체어에 앉혔다. 나는 우유와 버터에 푹 적셔 구워낸 프렌치토스트를, 남편은 아침부터 고기 생각이 났는지 토마토와 푹 익힌 소고기 스튜를 주문했고 아이는 계란후라이와 호밀빵을 먹었다. 아이는 바깥 음식이 낯선 건지 그나마 익숙한 계란후라이와 오믈렛 등 계란요리로 끼니를 해결했다.
아이는 후다닥 밥을 먹고 금새 의자에서 내려와 돌아다니고 싶은 욕구를 발산했다. 다행히 야외석이고 주변에 다른 아이들도 풀밭에 앉아 노는 분위기라 우리도 아이를 주변에 두고 지켜보면서 식사를 했다.
여행을 하면 일상에선 불가능해보이는 일도 자연스럽게 시도해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우리는 식당에서 아이가 칭얼대는 것이 신경쓰여 평소 외식을 자제했었다. 여러번 시도하다보면 아이도 외식할 때 주의해야할 부분을 배우고 적응을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을 어른인 우리가 견디지 못해 포기했다. 여행지에서는 오히려 선택지가 없으니 일단 부딪혀보게 됐고, 아이가 생각보다 잘 있어준다는 것을 알게됐다.
집콕 생활만 고집하던 세월 속에서 아이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어쩌면 여행은 아이의 성장테를 발견하는 순간들이 아닌지. 장거리 여행은 힘들지만 앞으로 계속 시도해야할 선물같은 과제라고 여행 후 일주일이 지나 여독이 풀렸을 남편에게 넌지시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