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스티스 Jul 24. 2024

딸이라 아쉬운 아빠의 최후

둘째 아이와 친정 아빠

지방에 있는 친정집에서 열흘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 밤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더운 도시라는 명성에 맞게 덥고 습한 공기가 자정에 이르러서도 식을 줄을 몰랐다. 첫째를 안방에서 재우고 난 뒤 아직도 잠들지 않은 둘째를 안고 동생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빠는 예정보다 사흘 일찍 우리를 서울로 떠나보내는 것을 아쉬워하며 동생 방으로 들어왔다. 늘 그렇듯 반바지에 난닝구 차림으로.

하얀 LED 전구가 켜진 좁고 환한 방 가운데 우리 넷은 우두커니 서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오전 일찍 일을 나가시는 아빠는 이 순간이 우리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빠는 두 손으로 둘째 아이의 볼을 감싸며 이마를 맞대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우리 이쁜이 또 언제 볼 수 있으려나. 우리 이쁜이 잘 가라. 또 보자. 아빠는 둘째의 이마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아빠가 이렇게 애정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난생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었다. 나는 연신 “또 올 텐데 뭘. 몇 년 후면 이제 한국에 아예 들어올 텐데 뭘”이라며 아이를 안은 채로 몸을 이리저리 피했다. 마치 어릴 적 외할아버지의 볼뽀뽀 세례에서 탈출하려 몸을 빌빌 꼬았듯. 그렇게 어색함을 떨쳐내려 했다.


불을 끄고 이미 자고 있는 첫째와 엄마 옆에 누웠다. 둘째는 몇 번 뒤척이다 곧 잠들었지만 나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아빠의 얼굴이 계속 어른거렸다. 어릴 적부터 홀로 해외 유학도 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며 부모님과 수도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했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유난히 낯을 많이 가리는 둘째가 신기하게도 외할아버지는 잘 따랐기 때문일까. 아빠는 아이들과 잘 놀아준다. 어릴 적 갓 태어난 사촌동생들도 아빠를 좋아했고 새침한 첫째도 아빠 방에 들어가 외할아버지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곧 잘 말했다. 거실에서 놀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부르면 항상 아빠 방에서 외할아버지와 별 것 아닌 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첫째는 첫 손주라 마냥 예쁨을 받았고 둘째는 첫째와는 다른 매력으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샀다. 낯을 많이 가리는 예민한 아이이긴 하지만 웃을 땐 함박웃음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르르 녹인다. 언니보다 울기도 잘 울지만 웃기도 잘 웃는 둘째는 하루 수십 번 우리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딸만 둘인 아빠는 내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둘째도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숨김없이 서운함을 드러냈다. 나는 그게 또 어이가 없고 서운해서 며칠 동안 화를 냈다. 아빠는 이번 둘째 돌잔치에서도 시아버님께 둘째가 아들이면 좋았을 텐데 서운하지 않냐는 말을 인사치레처럼 해서 나의 눈흘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둘째와 깊은 정이 들었는지 오히려 첫째 때보다 애잔한 이별을 했다. 서울에서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마지막 날에 아빠가 둘째를 보러 서울에 올라가고 싶어 한다는 말을 엄마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 마음이 짠하면서도 반가웠다. 아빠는 결국 서울까진 오진 않았다.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엄마 아빠를 만날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자라면서 내게 많이 해주지 않았던 진한 애정표현을 아이들에게 해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옷이며 신발이며 장난감이며 선물을 해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아이들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눈 한 번 더 맞추시려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이들을 통해서 내가 사랑받는 기분이다. 부모님께서 아이를 낳은 딸에게 주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겠지. 참 감사하고 소중한 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기념일에 김치볶음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