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해서 잠이 안 오면, 분노가 아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세가지 감정 심층 해부

by 조직탐험가K

과거 대기업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장 선배를 만났다. 대기업을 떠난 뒤에도 그는 10년 넘게 탄탄한 중견 금융기업에서 인사와 전략 업무를 이끌면서 CEO의 신망을 받았고, 최근에는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 속에서 조직을 살리기 위해 억울한 내부 고발까지 감수하며 회사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결과는 좌천이었다. 한직으로 밀려나 몇 개월을 버티던 그는 결국 사표를 냈고, 좌절감에 두문불출한 지도 꽤 되었다고 했다.


아무 잘못이 없어도 40대 후반에서 50대 사이에 권고사직을 당하는 일은 흔하다. 그래서, 두어달 쉬면서 다른 길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내친 김에 예전에 해보고 싶었던 일을 배우거나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선배의 경우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억울하게 회사를 떠난 사실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려놓기는 커녕, 무거운 감정이 가면갈수록 더 깊어진다고 했다. "분명 화가 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야. 억울하다는 말로도 부족하고, 슬픈 것과도 좀 결이 다른 것 같고. 그냥… 억울해서 잠이 안 온다"라고 했다.


선배의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중에 대화를 회고하면서,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자꾸 마음이 갔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이거였다. "그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예전에 심리학 관련 글에서 '자기감정을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전문 용어로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이라고 한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는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인 다음에 그에 맞는 치유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감정에도 정밀한 지도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부정적 감정을 뭉뚱그려 '화난다'고 표현한다. 조직의 리더들도 팀원 표정이 언짢아 보이면 "저 친구 화났나"로 읽는다. 정도가 좀 덜한 것은 '짜증난다'는 표현이 애용된다. 예전 김영하 작가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뭐든지 짜증난다고 표현하는데, 이건 너무 표현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비판했던 생각이 난다. 단순히 "화나!", "짜증나!" 같은 말을 되뇌인다고 해서, 부정적 감정이 줄어들지 않는다. 많은 경우, 그 감정은 훨씬 복잡하고 결이 다른 감정이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교수를 지낸 심리학자 리처드 라자루스(Richard Lazarus)는 1991년 저서 《Emotion and Adaptation》에서 '감정'을 '상황에 대한 인지적 평가(cognitive appraisal)의 산물'로 정의했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까 선배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그가 느꼈던 감정은 분노, 억울함, 서러움, 막막함 등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정확하게 그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 생각한 끝에 결국 찾아낸 단어는 '울분'이었다. 분노, 서러움, 울분은 모두 '부당함'이라는 같은 토양에서 자라지만, 그 평가 방식과 감정이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이 리더에게 왜 중요한지는 글의 마지막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먼저 세 감정을 하나씩 해부해 보자.


분노: 불꽃처럼 타오르는 즉각적 반응


분노는 세 감정 중 가장 외향적이고 즉각적이다. 분노는 '나의 목표나 경계가 침해당했다'는 평가에서 촉발되며, 행동 지향적이다. 항의하거나, 맞서거나,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충동이 뒤따른다.


분노를 이해하는 핵심은 시간성과 통제감이다. 분노는 급격히 타오르지만 비교적 빠르게 식는다. 그리고 분노는 "내가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능동적 통제감을 전제로 한다. 싸울 힘이 있다고 느낄 때 분노가 나온다. 신체는 솔직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심박수가 오르면 자연스레 주먹이 꽉 쥐어진다.


분노의 건강한 면도 여기 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경계 침범을 알리는 경보 시스템이고, 효과적으로 표출되면 금새 해소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회의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상사가 가로챘을 때 순간적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누군가에게 부당한 말을 들었을 때 즉각 반박하여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 충동 — 이것이 분노다. 적절히 표현된 분노는 카타르시스를 유발하고, 때로는 복잡한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주기도 한다.


서러움: 억울함과 슬픔이 뒤섞인 눈물


서러움은 한국어가 가진 독특한 감정 어휘다. 영어의 'sadness'나 'grief'로는 온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서러움은 억울함 + 슬픔 + 무력감이 복합된 감정으로, 분노와 달리 내면으로 향한다. 싸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울게 만드는 감정이라고나 할까.


서러움은 대체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혹은 자신이 아끼는 무언가와 연결이 손상될 때 생긴다. 적대적 타인보다는 믿었던 사람, 기대했던 상황과의 괴리에서 솟아난다.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라는 억울함이 슬픔의 형태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눈물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라자루스의 이론으로 보면, 서러움의 평가 구조는 낮은 통제감과 결합되어 있다.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감각 때문에 분노로 폭발하지 못하고 눈물로 흐른다. 수십 년을 헌신한 조직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밀려나는 느낌을 받는 중간관리자, 믿었던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느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차오르며,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


서러움이 분노와 다른 중요한 지점이 하나 더 있다. 서러움은 표현되고 나면, 즉 실컷 울고 나면 어느 정도 풀린다. 서러움에는 자연스러운 배출구가 있다. 문제는 그 배출구조차 막혀있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울분이다.


울분: 출구 없는 분노의 만성적 응결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 감정 중 가장 복잡하고, 어쩌면 가장 위험한 감정을 살펴볼 차례다. 울분(鬱憤)은 글자 그대로 '막힌 분노'다. 분노(憤)가 억눌려(鬱) 해소되지 못한 채 가라앉은 상태다. 한자 '울'의 구성을 보면, 상단은 숲(林)과 덮개(冖), 하단은 술항아리(缶) 등 복잡한 형태로 구성되어, 기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다. 분노가 불꽃이라면 울분은 산소를 차단당한 채 속으로만 타들어 가는 숯불이다. 서러움이 눈물로 흘러나온다면, 울분은 흘러나오지 못하고 내부에서 은은한 통증을 유발한다.


찾아보니, 울분을 임상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한 외국의 학자가 있다. 독일의 정신의학자 미하엘 린덴(Michael Linden)이다. 2003년 그는 '외상 후 울분 장애(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 PTED)'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2007년 저서 《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에서 울분이 병리적 수준에 이르는 조건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부당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인식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울분한 사람의 억울함은 대부분 객관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망상이 아니다. 둘째, 그 부당함을 바로잡을 수단이 없다는 무력감이다. 제도가 막혀 있거나, 가해자가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시간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지났을 때다. 셋째, 그럼에도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못하고 계속 그 사건에 붙들려 있는 상태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억울한 장면이 반복해서 떠오른다.


이 세 가지가 겹칠 때 울분은 만성화된다. 린덴의 연구에 따르면 PTED 환자의 100%가 그 사건에 대한 침습적 반추(intrusive thoughts)를* 경험했고, 평균 유병 기간이 31.7개월에 달했다고 한다.

*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원치 않는 불쾌한 생각, 기억, 이미지 등이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라 괴로움을 겪는 상태


울분이 분노와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


울분과 분노의 가장 큰 차이는 표현 가능성이다. 분노는 쏟아내면 줄어든다. 항의하고, 맞서고, 관계에서 해결점을 찾으면 분노의 연료가 소진된다. 그러나 울분은 쏟아낼 대상도, 방법도 없다. 억울함의 원인이 이미 끝난 과거이거나, 바꿀 수 없는 제도이거나,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상대방일 때 울분은 깊어진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울분은 강한 도덕적 의분(義憤)의 성격을 띤다. "이것은 옳지 않다. 나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이 도덕적 확신이 울분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자신이 틀렸다면 분노도 수그러들겠지만, 울분한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려놓지 못한다.


글 서두에 소개한 사례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는 실제로 옳은 일을 했고, 실제로 부당한 결과를 받았다. 그래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억울해서 잠을 못 잔다"는 말이 울분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언어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울분은 치료가 어렵다


린덴은 울분이 다른 감정 장애와 다른 결정적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울분한 사람은 우울증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지만, 일반적인 우울증 치료인 인지행동치료나 항우울제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인지행동치료의 핵심 원리는 '왜곡된 인지를 교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울분한 사람의 인지는 대부분 왜곡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부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치료적 접근이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치료자에게도 방어적으로 반응하고, 도움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린덴은 이를 "울분한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유를 원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이 때문에 린덴은 울분에 특화된 '지혜 치료(Wisdom Therapy)'를 별도로 개발했다. 핵심은 부당함의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억울함이 삶 전체를 통제하지 않도록 내적 거리두기(psychological distancing)를 훈련하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부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새로운 의미의 틀을 만드는 작업이다. 불교의 수행 방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와 같은 접근을 잘 발달시켜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세 감정을 구분하는 리더가 조직을 살린다


심리치료사는 아니지만, 리더는 구성원의 감정을 읽어야 한다. 특히 부정 감정을 잘 읽어야 하는데, 그 핵심은 결이 다른 부정 감정을 구분하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분노, 슬픔, 울분 같은 감정 말이다. 그 이유는 각 감정에 필요한 대응이 다르기 때문이다.


분노한 사람에게는 즉각적인 경청과 공정한 해결이 필요하다. 분노는 문제를 가리키는 신호이므로, 빠르게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해야 한다. 서러운 사람에게는 공감과 존재 인정이 먼저다.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알고 있다"는 한 마디가 서러움을 녹인다. 그러나 울분한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 충분하지 않다. 울분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억울함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도, 잊으라고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경험한 것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한 후, 그 경험이 삶 전체를 소진시키지 않도록 새로운 의미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한 리더만이 울분을 안고 있는 구성원을 잃지 않는다. 감정을 잘못 읽으면 엉뚱한 대응을 하게 되고, 그 결과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나가면서


직장 선배와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만남 끝에 건져낸 나를 위한 교훈...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것, 그것이 치유의 출발점이다.

정밀한 감정 독해력이 리더십의 핵심 역량이다.


당신이 오랫동안 품어온 감정에 가장 가까운 이름은 무엇인가요?

분노인가요, 서러움인가요, 아니면 울분인가요? 댓글로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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