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첫 글
#1. 변화-1
사주에서 올해 변화가 많은 해라고 일렀는데, 나의 안과 밖의 여러 변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눈에 보이는 밖의 변화부터 말하자면 이사를 갔다. 햇수로 8년 살던 용산 내 서울역-숙대입구 인근을 벗어나 중구 신당동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원룸에서 투룸으로의 이사인 만큼 가구도 늘었다. 거실엔 쇼파와 큰 책장을 들였고, 반려식물 두 친구도 창가 옆에 자리하게 됐다. 쇼파와 책장이 마주보고 있어서 그런지 이전보다 책을 많이 읽게 됐다. 원룸에 살던 시절에는 집 안에서 '책을 읽을거야'라고 5번 정도 마음 속으로 외치고 나서야 책 첫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잠 자는 공간과 활동하는 공간이 분리돼서 발생하는 여유 때문인지, 지금은 쇼파에 앉아 눈 앞 책장을 바라보면 자연스레 손이 앞으로 향한다.
혼자 살지만 싱글 사이즈였던 침대도 퀸 사이즈로 바꿨다. 이사는 2월 말에 했지만, 침대는 어제 새로 설치했다. 혼자 잘 때 이리저리 뒹굴러도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몸을 빨아들이는 쾌감이 있다. 또 앞으로 누가 와서 같이 자더라도 편히 잘 수 있겠지.
직장 내에서는 팀이 바뀌었다. 부서는 바뀌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중요도(?) 높은 출입처를 맡게 됐다. 이사와 팀 변동이 같은 시기에 이뤄지다보니 올 2~3월은 정신없이 보낸 듯하다.
#2 변화-2
내적인 변화로는 욕구가 좀 떨어졌다. 식욕도 성욕도 분명 예전보다 왕성하진 않은 느낌. 여전히 매주 한 번은 맛있는 음식 찾아 떠나곤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감동을 느낄 수준의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든다. 31년 짧은 인생이지만, 꽤 많은 경험치가 쌓여서? 아니면 인간이 으레 겪는 열정 소실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음악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조금씩 식어갔는데, 음악을 사랑했던 주위의 많은 이들도 같은 과정을 겪고 있다. 박모씨는 이를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시대의 문제라 칭하기도 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큰 기대까지는 생기지 않는다. 아직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행위 자체를 워낙 좋아해 직장 내에서도 꽤 성과를 내고 있지만, 사적 영역에서 특히 그렇다. 지난해 헤어지고 소개팅을 몇 번 했는데, 확 끌리는 사람을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작년부터 시작한 무력감이 더 심해진 기분. 작년에 이 짜증나는 감정을 어떻게 떨쳐냈나 생각해보니, 타투를 하고 독서모임을 하고 새 여자를 만나고 그랬다.
채우고 싶지만 메울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지금까지는 재미를 찾기 위해 새 사람을 찾곤 했다. 나의 부족분을 타인이 채울 수 없단 걸 알면서도, 아니 그런 생각 자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새 사람을 만났다. 외적으로 맘에 든다면, 첫만남의 즐거움이 잠시나마 무력감을 벗어나게 해서 그런 듯하다. 이대로는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구축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수 년 전부터 언젠가는 종교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두 번 아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종교를 갖는 다는 건, 삶 전체에 대한 태도를 특정 종교의 가르침으로만 한정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이 뜻을 제한하지 않으면, 나는 이미 여러 책을 읽으며 종교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에. 현재의 나는 종교인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종교를 갖고 그것을 절대적 기준, 기댈 곳으로 여겨 버리면 정신적으로 게으른 행위다 싶어 거부해왔다. 종교를 갖는다고 이 무력감이 해소될 것이란 보장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꽤 열심히 파고 들어가는 습성이 있어, 무력감을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종교를 갖고 싶지 않다. 내 식대로 세상을 느끼고 숨겨진 많은 부분을 보며 이 무력감을 극복하고 싶다. 이 무력감을 극복하게 되는 순간이 종교'적'인 것으로 인해 다가올 수는 있다고도 본다. '종교적'이라는 단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뉘앙스가 다를 수는 있지만, 설명이 너무 길어지면 노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