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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홍 Aug 18. 2022

턱걸이하는 기분과 최선

이게 나의 최선이에요

얼마 , 드라마를 보다가 지난 10년간의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문득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너는 너의 최선을 다했어'


예전의 나라면 스스로에게 해주지 못했을 말이었다. 그 말은 너무나도 생경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친숙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어쩌면 늘 내 안에 있던 목소리였지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듣고 믿어보려 한 적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들리는 목소리를 입밖으로 꺼내 소리내 보았다.




어정쩡한 최선과 턱걸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입시 공부를 하지 않았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소심함을 극복하지 않았어.'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나는 더 나은 회사,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구나.'


매번 턱걸이하는 기분이었다. 하기 싫은 일에서 도망갈 용기도 없었고, 눈 딱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최상의 결과를 위해 매진할 끈기와 독기도 없었다. 노력을 위한 노력밖에 할 줄 몰라서 일단 끝나기만을 바라던 시간들의 반복이었다.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 나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으니까. 숨을 돌리고 다시 삶의 과제가 다가올 때는 새로운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가 또다시 턱걸이를 할 수 있을까, 아니 평생을 이러고 살 수 있을까.


애매한 끈기와 미적지근한 노력

그리고 '어정쩡한 최선'.


그렇게 나는 어정쩡한 인간이 되어버렸고,

스스로를 내세울만한 성취나 시간들도 없는 빈털터리라고 굳게도 믿어버렸다.

턱걸이나 간신히 하는 애매모호한 인간은 이도저도 아닌 경계에서,

결국 어느 방향으로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헛발질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실패하고야 말 애매한 노력


언제나 나로써 가능한 백퍼센트를 발휘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했다. 이른바 '생산성'을 최대로 하여 내가 가진 자원인 시간과 정신력을 쥐어짜내어 시험을 잘봐야 했고, 자존감 낮은 나를 뜯어고쳐야 했고, 주어진 일을 해내야 했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인간인 나는 언제나 열과 성을 다해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학습된 엉덩이 힘과 적당히 타고난 참을성 덕분에 턱걸이를 했을 뿐이었다. 턱걸이 뒤엔 남는 건 어영부영 노력했다는 자책과 성에 차지 않는 당연한 결과였다. 마일리지 쌓이듯 차곡차곡 적립된 '쓸모없음 포인트'는 거대하게 불어나서 존재의 의미를 위협했다.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는 어정쩡한 인간은 쓸모도 없고, 사랑받을 구석도 없어.'


내가 무엇을 해내지 않더라도, 대단하고 거창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존재가 받아들여지는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건 스스로를 사랑하지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런 결핍이 애매모호한 인간의 자책감에 깊이를 더했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더욱이 최선의 효율이 아니라면 쓸모없고 의미없는 존재인 것만 같다는 느낌은 아마도 사람이 느끼는 최악의 기분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그런 기분 안에서 오랫동안 허우적댔다.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면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모든 나와 나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받아들여주고 싶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하던 '나'도, 그런 '나'를 미워하고 박하게 대하던 '나'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나'도, 그리고 그때의 모든 '나'를 수고했다고 최선을 다한거라고 말해주는 지금의 '나'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최선은 오롯이 결과로만 판단할 수 없다. 살면서 어떤 일들의 결과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통제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유일한 통제변수라고 믿는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는 게 가장 현실적이라고 믿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나온 시간들은 모두 나만의 성취가 아니라, 실패와 부족함의 부스러기 같은 느낌만 남았다. 사람이라면 기계처럼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수치화 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상적인 모습을 기준으로 잣대를 들이대면 언제나 나는 실패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채점을 하듯이, 최적의 효율을 위한 기계처럼 나를 대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아마도 최선이란 순간에 머무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나씩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 어딘가에 분명 도착할 수 있고,

턱걸이를 하는 기분하고는 달리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최선은 다르고, 이게 나의 최선이라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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