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마음이란 격류에 밀리고 내던져지는 오갈 데 없는 피조물의 기분인 동시에 살아 있음을 가장 능동적으로 실감하는 고양된 상태다."
씨네 21 김혜리 기자의 문장에 의지해 글을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어서다. 누군가 "영화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그냥, 그래"라고 답하는 사람이었다. 영화 속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감각하는 일은 매번 낯설었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에서 우르르 걸어 나올때 느껴지는 허탈한 감정이 묘하게 불편했다. 곤히 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켜진 불에 눈뜬 기분이랄까.
요즘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동안 내가 느껴온 불편한 감정을 꺼내보게 되었다. 나는 영화를 곱씹을 틈도 없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싫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비행기를 타는 게 싫어서 제주도까지 별로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비행기가 불편하면 배를 타고 제주에 가면 되듯 나는 이제 영화관이 아닌 방에서 영화를 본다. 잔잔한 새벽 시간은 특히 좋다. 현실로 돌아오지 않고 잠들어도 그만이니까.
이번 주에 본 영화는 조나단 레빈 감독, 조셉 고든 레빗 주연의 <50/50>(2011)이었다. "살 수 있는 확률 50%, 죽게 될 확률 50%" 50/50은 척추암에 걸린 주인공 아담의 생존 확률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죽음이지만, 죽음은 상상하기 힘든 미지의 영역이다. 암에 걸린 아담의 마음을 가늠할 수는 있지만, 온전히 알 수는 없는 이유다.
아담에게는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따위의 위로의 말이 와 닿지 않는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걱정을 하는' 엄마도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에게 위로가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영화에서 아담의 표정을 유심히 보았다. 아담의 눈빛이 온순하고, 편안해지는 순간이 언제인지 보았다. 처음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간 아담은 다른 암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역시 처음으로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유일하게 같은 처지의 사람들만 줄 수 있는 위로다.
병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아담은 그의 상담치료사 캐서린과 우연히 만나고, 캐서린은 아담을 집까지 태워다 주게 된다. 캐서린에게는 몇 번의 상담을 받았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터였다. 아담의 눈빛이 달라진 순간은, 캐서린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직후이다. 캐서린도 겪고 있던 실연의 아픔은 아담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의 애인도 떠났으니까. 이 또한 같은 감정을 경험하는 사람이 줄 수 있는 위로다.
결국 위로는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과 나눌 수밖에 없는 걸까? 소중한 사람의 슬픔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걸까? 아담의 친구 카일을 통해 짐작해본다. 카일은 아담을 암에 걸리기 전과 거의 똑같이 대한다. 같이 클럽에 가고, 바람피운 아담의 애인을 욕 하며 일상을 함께 한다. 심지어면허가 없는 아담이 운전을 해보고 싶어 하자, 차 키를 건네기도한다. 그런 카일의 모습에『슬픔의 위안』이란 책 속의 문장이 겹쳐졌다.
만약 죽어가는 누군가를 보살피고 있거나 누군가가 슬픔을 이겨내도록 돕고 있다면 (...) 그 사람에게 여유를 주자. 사랑하는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도록 놔둔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50/50>의 엔딩 크레디트가 천천히 올라가고, 삶, 죽음, 관계, 위로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영화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네, 좋아해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