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보라색 다이어리에 짧은 일기만 끄적였다. 긴 호흡의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은 데다 완성된 글은 못나 보였다. 읽고 있는 책 속의 문장과 내가 써낸 문장 사이의 거리가 아득하기만 했다. 좋아서 하던 일을 잘하고 싶어 졌고, 그 마음(욕심)에 갇혀서 멈춰 섰다.다행히 몇 번의 경험을 해본 터라 벗어나는 방법을 안다. 이런저런 생각을 내려놓고 일단 쓰는 것. 매일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듯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개운해진다 걸 알고 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집안 가구 배치를 바꾸듯, 브런치에 "시공간"이라는 매거진을 열었다. '시를 읽고, 시에 대해 쓰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시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어의 기척을 세심하게 느끼고, 그 느낌을 문장으로 지어내고 싶다. 시를 읽고 정확한 감상을 보탤 수 있는 독자였으면 좋겠다. 번번이 실패하지만 그럴수록 간절해진다. 시를 쓴 시인조차 몰랐던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면? 보물 찾기의 짜릿함을 상상한다.
누군가에게 말하듯 글을 써보려고 한다. 시와 함께 동봉할 짧은 편지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정한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읽는 이의 마음에 고이 스며서시를 찾아 읽고 싶어 지게 된다면 바랄 게 없겠다. 김수영 시인의 「봄밤」을 읽고, 쓰는 첫 번째 글을 부친다.
김수영의 봄밤
「봄밤」이라는 시 한 편을 갖고 싶어 『김수영 전집』(민음사, 2019)을 샀어요. 살면서 벼랑 끝에 몰리는 기분이 들 때 읊조리는 시예요. 덜컹거리다가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마음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라는 구절을 중얼거리다 보면 다시 길을 찾아요. 김수영의 봄밤은 인생의 다채로운 모습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시라고 해요.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는 시구를 반복하며, 삶의 '밝음'과 '어두움'으로 대체될 수 있는 시어들이 연속적으로 교차되거든요. 가만히 읽다 보면 시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당황하지 말고, 담담하게 존재하라고. 그렇게 견디면 다 지나갈 거라고. 이어지는 시구인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 그 불빛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해져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어렵다는 걸 날마다 느끼거든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도태되는 기분에 불안해지곤 해요. 그럭저럭 버틸만했던 어지럼증이 휴직한 뒤로 심해져서 병원에 갔더니 일을 그만두면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되물었어요. "저는 지금 충분히 괜찮은데 왜 그런 거죠? 스트레스 받는 일도 없어요." 의사 선생님은 괜찮은 게 아닐 거라고 하셨어요. 쓸데없는 긴장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중입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 김수영 「봄밤」 중에서
황현산 평론가는 그의 산문집 『사소한 부탁』(난다, 2019)에서 김수영의 시 「봄밤」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김수영의 봄밤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오오 봄이여'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는 것은 그 애태움을 그치자는 뜻이 아니다. 저 애타는 마음은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간직해서 무거운 몸을 조금 떠 있게 하자는 것이다. 무거운 몸에서 그 무거움을 가능한 한 많이 지우자는 것이다. 현실을 조금 덜 현실이게 하자는 것이다."
시를 읽고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마음을 평론가의 글에서 만나 반가웠어요. 그동안 나는 '현실을 조금 덜 현실이게 하'기 위해 김수영의 시를 수없이 읊조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현실을 조금 덜 현실이게 하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무거운 몸을 떠 있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음악을 듣고, 시를 읽고, 따듯한 차를 마시는 일들. 일상에서 짬짬이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이 현실을 조금 덜 현실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