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표를 챙겨 넣은 것처럼 묘한 설렘을 느낄 수 있거든요. 시인의 시에는 여행의 냄새가 나요. 시의 말들에는 낯선 곳에 당도했을 때의 생경함이 묻어 있고요. 가만히 펼쳐 읽고 있으면 다정한 기척들까지 만날 수 있어요.
막차를 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깊은 밤
역 앞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성이고 있는데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
책을 주워들었다
우수수 낙엽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책을 조금 오므렸다
이미 책장 사이로 꽂힌 낙엽들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낙엽들을 읽기 위해 나는 조금만 더 밝은 곳이 필요했다
막차를 타지 않고 부산에 남기로 했다
- 이병률 「부산역」 부분
여기 막차를 타지 못한 화자가 있어요. 일정이 바뀐 걸까요. 기차 시간을 놓친 걸까요.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 한 권' 때문이네요. 책장 사이의 낙엽들이 나를 올려다보니까. 나는 그 낙엽들을 읽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길에 떨어진 책 한 권, 그 안에 들어 있던 낙엽을 읽기 위해 막차를 타지 않은 이를 사랑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세상의 잣대에 조금은 동떨어져 있는 사람을 동경해요.
우리는 가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깊은 밀도로 가까워지기도 하지요. 이런 관계의 이면에는 분명한 이별이 있어서 가능한 것 같아요. 일상으로 돌아가면 더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서로가 쉽게 예감하니까요. 이병률 시인의 다음 시편 「상해식당」 에도 그런 애틋함이 어른거리네요. 여행 중 잠시 일하던 식당을 떠나야 하는 날, 함께 일하는 동료가 뭐라고 자꾸 말을 걸어요. 그의 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화자는 한자로 필담을 하게 되는데요.
만두를 빚던 하얀 밀가루 위에 '가지 마요, 안 가면 안 되나요'라고 쓰여 있어요.
(···)
가지 마요,
안 가면 안 되나요
눈빛을 교환하면 안 될 것 같아
그 시간의 반죽을 툭 잘라버리고 싶은데
어딘가에 좀 앉아야겠는데
그러지 않으면 힘 풀려 터져버린 세계가
와르르 쏟아져버릴 것 같은데
상해 중국식당 주방에는 정말이지 의지가 없었지
- 이병률 「상해식당」 부분
옮겨둔 시 구절을 기점으로 화자의 마음이 '와르르 쏟아져'나오네요. '눈빛을 교환'할 수 없어 '시간의 반죽'을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은 어떤 걸까요? '가지 마요'라고 말하는 동료의 눈을 차마 보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요. 참고 싶은데 참아지지 않는, 도무지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있네요. 몸에 힘이 풀린 그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끌어다 주고 싶어 져요.
이병률 시인의 시를 처음 읽고 싶어 진 건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였어요. 그 산문집에 등장하는 시인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봐 주는 사람이더라고요. "적게 말하고 적게 웃는 슴슴한 모습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함께 밥을 먹자고 만날 때에도 그랬다. 음식은 풍족하게 주문하고 말수는 적었다. 늘상 물잔을 채워주고 수저를 놓아주는 일을 차지할 뿐이었다. 헤어질 때에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제 갈 길로 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부분
이 문장을 읽고 만나게 된 이병률 시인의 시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 틈틈이 사려 깊은 손길이 있었어요. 그건 마치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걸어주거나, 축 쳐진 등을 쓸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역시 글은 쓰는 이를 닮을 수밖에 없구나, 싶더라고요.
삶에 치이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여행의 풍경, 냄새, 질감 같은 것들을 떠올리시나요? 혹시 그런 기억조차 희미해져 더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이병률 시인의 시집을 펼치시기를 바라요. 시인이 불어넣은 낯선 공기 안에서 편안해지실 거예요. 끝으로 책날개에 적힌 시인의 말을 옮겨둘게요.
집이 비어 있으니 며칠 지내다 가세요 바다는 왼쪽 방향이고 슬픔은 집 뒤편에 있습니다 더 머물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나는 그 집에 잠시 머물 다음 사람일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