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공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꺼움 Feb 23. 2021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오늘은 처음으로 만났던 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요. 색색의 시집이 나란히 꽂혀 있는 저희 집 책장에서 가장 오래된 시에 담긴 이야기예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 친구들과도 장소를 정해 만나야 했던 1990년대였어요. "12시까지 동국서림 앞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을 자주 했어요. 서점 앞이라면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책을 둘러보고 있으면 되니까요. 1997년 동국서림에서 열네 살 저는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열림원, 1996)이라는 시집을 샀어요.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시집은 책장에 꽂혀 있어요. 하얗던 책 표지에 떼가 타고, 내지는 빛바랬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씩 꺼내서 마른 휴지로 먼지를 닦는 것뿐이네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까요. 시집과 더불어 낡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따금씩 의지가 되기도 해요. 이제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시공간으로 데려와 볼게요.

(···)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부분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기 위해 평생 함께 해야 했던 외눈박이 물고기들의 이야기는 사랑을 잘 몰랐던 어린 마음에 잔잔한 파동이 일게 했어요. 물고기들의 사랑을 떠올리면 슬프지만 따듯했던 것 같아요.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모르지만 이 특별한 물고기들의 이야기가 소중하고, 애틋했어요. 돌이켜보면 외눈박이 물고기 두 마리를 가슴에 품고 저도 자랐던 것 같아요.


이제 어른이 된 저는 외눈박이 물고기에게서 '결핍'을 발견해요. 우리 모두에게는 결핍, 각자의 모자람이 있고 그런 우리들이 만나 서로를 채웠을 때 살아지는 삶을 생각하곤 해요. 에로스적인 사랑뿐 아니라 살면서 맺는 모든 관계들이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는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릴테니까. 내가 지탱해주고 있는 누군가, 나를 지탱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버텨지는 일상을 이제 알아요. 백지를 글자씩 채워가는 저의 역시 당신이 있기에 버텨요.




외눈박이 물고기의 이야기를 지나 천천히 시집을 다시 읽다가 눈물이라는 시에서 오래 머물렀어요. 시를 읽기 전에는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처음 만났던 시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맺으며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이는지 당신에게도 살짝 열어둘게요.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이 환하다

누가 등불 한 점을 켜놓은 듯

노오란 민들레 몇 점 피어 있는 듯


(···)


눈썹 끝에

민들레 풀씨 같은

눈물을 매달고서

눈을 깜박이면 그냥

날아갈 것만 같은



- 류시화 눈물 부분


Photo by Timothy Eberly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