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처음으로 만났던 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요. 색색의 시집이 나란히 꽂혀 있는 저희 집 책장에서 가장 오래된 시에 담긴 이야기예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 친구들과도 장소를 정해 만나야 했던 1990년대였어요. "12시까지 동국서림 앞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을 자주 했어요. 서점 앞이라면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책을 둘러보고 있으면 되니까요. 1997년 동국서림에서 열네 살 저는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열림원, 1996)이라는 시집을 샀어요.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시집은 책장에 꽂혀 있어요. 하얗던 책 표지에 떼가 타고, 내지는 빛바랬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씩 꺼내서 마른 휴지로 먼지를 닦는 것뿐이네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까요. 시집과 더불어 낡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따금씩 의지가 되기도 해요. 이제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시공간으로 데려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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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부분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기 위해 평생 함께 해야 했던 외눈박이 물고기들의 이야기는 사랑을 잘 몰랐던 어린 마음에 잔잔한 파동이 일게 했어요. 물고기들의 사랑을 떠올리면 슬프지만 따듯했던 것 같아요.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모르지만 이 특별한 물고기들의 이야기가 소중하고, 애틋했어요. 돌이켜보면 외눈박이 물고기 두 마리를 가슴에 품고저도 자랐던 것 같아요.
이제 어른이 된 저는 외눈박이 물고기에게서 '결핍'을 발견해요. 우리 모두에게는 결핍, 각자의 모자람이 있고 그런 우리들이 만나 서로를 채웠을 때 살아지는 삶을 생각하곤 해요. 에로스적인 사랑뿐 아니라 살면서 맺는 모든 관계들이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는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릴테니까. 내가 지탱해주고 있는 누군가, 나를 지탱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버텨지는 일상을 이제 알아요. 백지를 한 글자씩 채워가는 저의 글 역시 당신이 있기에 버텨요.
외눈박이 물고기의 이야기를 지나 천천히 시집을 다시 읽다가 「눈물」이라는 시에서 오래 머물렀어요. 시를 읽기 전에는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처음 만났던 시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맺으며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이는지 당신에게도 살짝 열어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