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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Mar 02. 2021

따뜻한 기운이 한두 번 찰랑였다

이원하 「필 꽃 핀 꽃 진 꽃」

3월이네요. 3월의 첫날에 내린 비를 봄비라고 불러도 되겠죠?


오늘은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일이었어요. 아침부터 살짝 상기된 얼굴에 설렘과 긴장이 묻어 있더라고요. 자기 몸보다 큰 가방을 메고 걷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울렁였어요. 코로나로 보호자의 교실 입실이 안 되는 탓에 혼자 올라간 아이를 교문 앞에서 기다리며 생각했어요. 여덟 살 때 나는 어떤 기분이 었는지, 그날 교실의 분위기는 어땠었는지. 어쩌면 엄마가 되는 일은 아이를 통해 일생을 한번 더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이번에 소개할 시는 꽃을 말하는 시예요. 이원하 시인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2020, 문학동네)에 담긴 시입니다. 시인의 시에 관해서는 언젠가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다시 읽으며 새롭게 다가온 시가 있어서요. 이 시를 읽고 아름답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는데요. 그런 점에서 시가 봄비와 닮은 것 같기도 하네요. 내리는 비를 보면 봄을 마중하는 기분에 들뜨면서도, 외로워지기도 하니까요. (구체적인 느낌을 말이나 글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건 매번 어려워요.) 이제 시를 열어 볼게요.



(···)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곳이면
일 년 내내 봄일 거라 생각했으나 살아보니
녹아내리다가 우연히 시원했고
얼어붙다가 따뜻한 기운이 한두 번 찰랑였다

밥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시들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고 생각하기를 멈췄다

필 꽃 안으로 빠져나가듯 들어가 밥을 먹었다
숨이 멎을 것처럼 안전했다 안전은 잠시뿐이었다

핀 꽃 위에서 포만감이
미끄러지듯 내려왔고 소화를 시키려

진 꽃
을 손에 들고
버리러 갔더니,

버리고 와서야 알았다



이원하 「필 꽃 핀 꽃 진 꽃」 부분


'봄에 태어'나 '봄에만 살면 좋을 것 같아서'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는 섬으로'으로 이사한 시적 화자가 꽃을 이야기해요.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곳'이라고 '일 년 내내 봄'은 아니었네요. '우연히 시원'하고 '따뜻한 기운이 한두 번 찰랑'일 뿐이었어요. 일 년 내내 꽃이 피어서 일 년 내내 봄이라고 말하는 시라면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계절도 사람도 변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다음 연들에서는 '필 꽃'과 '핀 꽃'과 '진 꽃'이 나타납니다. '밥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시들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고 생각하기를 멈췄다'라는 연의 뒤에 이어지는데요. 난데없는 등장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어요. 시는 쓰겠다고 마음먹고 쓰는 게 아니라 생활에 스며 쓰이는 것이구나, 그러다 흘러나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더라고요.


시의 주인공은 '필 꽃' 안에서 밥을 먹으며 잠시 안전했고, '핀 꽃 위에서' 미끄러진  '포만감'을 소화시키려 '진 꽃'을 버리러 갔네요. 마지막 연에서 말해요. '버리고 와서야 알았다' 무엇을 알았다는 걸까요. 읽는 이에게 정리되지 않는 감정을 건네며 시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시가 남긴 여운은 이제 시작이에요. 시의 물음을 나의 삶에 비추어 보는 시간.


일 년 내내 봄일 수 없고, 영원히 피어 있을 수 없으니 우연히 시원할 때, 따뜻기운이 한두 찰랑일 때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 발 늦게 알게 돼서 아쉽게 곱씹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잘한 것 같아요. 처음으로 등교하는 아이의 표정을 기록해두었으니까요. 제 삶에서 '따뜻한 기운'이 찰랑이는 순간이었을 거예요.



당신의 오늘은 어떠셨나요?


<글머리 사진>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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