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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Mar 09. 2021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이문재 「어떤 경우」

요즘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일과 육아의 경계가 없어서 그저 하루를 버티기 바빴던 것 같아요. 빨리빨리로 시작해서 빨리빨리로 끝나는 하루였어요. 달려가는 시간을 정신없이 쫓아가느라 벅찼어요. 지난해 휴직을 하면서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이 생활이 되었어요. 오롯이 엄마의 역할을 하게 되자 판단할 일이 더 늘어나는 것을 느껴요. 기본적인 생활습관을 잡아주는 일부터 어떤 학원에 보내고, 어떤 과목을 시키느냐 하는 문제들 앞에서 고민이 커졌어요. 엄마가 없는 빈 시간을 메워주기 위한 선택이 아닌, 아이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방식의 하루 일과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제일 어려운 건 교육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언젠가 초등학생 딸아이가 자기는 '수포자'라고 했을 때는 뜨끔한 마음이 들었어요. 무책임한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진작 잡아줬어야 하나, 학원이라도 일찍부터 보내볼걸, 나중에 원망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어요. 엄마가 중심을 잡고 끌어주는 맞는 같다가도, 뭔가를 억지로 시키는 아닌 같아서 멈칫하다 보니 다시 신학기가 되었네요. 처음 의욕과 달리 바뀐 게 별로 없어요. 국영수 학원은 다니지 않기로 했고, 학습지만 계속해보기로 했어요. 피아노가 배워보고 싶다고 해서 학원에 보내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학기는 다양한 정보와 선택지 앞에 무력하게 노출되는 시기예요. 그럴 때면 유독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가 되더라고요. 그런 마음으로 시를 읽다가 이문재 시인의 「어떤 경우」라는 제목의 시를 만났어요. 이문재 시인의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이라는 시집 안에 담긴 시인데요. 천천히 읽어 보시겠어요.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 이문재 「어떤 경우」 전문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힐 테지만 저는 이렇게 읽었어요. '나는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이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세상 전부일 거야.'라고요. 흔들리는 엄마가 아닌 편안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어요. 불안한 마음에 다그치는 대신, 믿고 안아주는 걸 택하고 싶어요. 길을 만들어주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가 만드는 길을 같이 걸어줄 수 있기를 바라요. 여기까지의 사유에서 끝났던 저의 시 읽기는 평론을 읽으며 더 깊어졌어요.


시집 말미 신형철 평론가의 평론을 통해 포착하지 못했던 지점을 발견했거든요. 이 시는 빌 윌슨의 아포리즘인 "세상에게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당신은 세상일 수도 있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문재 시인은 마지막 3연에서 기존의 아포리즘을 뛰어넘는 순간을 보여준다고 해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세상 전부일 수 있다는 것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인 나와 '세상 전부'인 나를 등(and)하게 놓아주는 것이 그것이죠.


그렇게 3연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세상 전부인 나와,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인 나 사이에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요. 아이들은 자신의 길을 걷고, 저도 저의 길을 걷는 상상을 해요.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걷다가 때때로 만나게 되겠지요. 아이들이 힘들 때는 제가 끌어주고, 엄마가 지쳐 있으면 아이들이 밀어주는 그런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불안이 희미해진 자리에 작은 용기가 생겼어요. 시에서 만난 따스한 기운을 당신에게 건네보는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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