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공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꺼움 May 15. 2021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이창동 <시>(2010)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연둣빛 어린잎들은 초록을 가득 머금고 있네요. 곧 있으면 여름입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영화를 가지고 왔어요. 이창동 감독의 <시>(2010)입니다. 최근에 아를 출판사에서 <시>의 각본집이 출간되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제63회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 이력에 더해 평소 신뢰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의 추천 덕분에 영화를 향한 기대감이 커지더라고요. 그렇게 저는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한 각본집을 기다리며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작가 노트에 쓰여 있는 글로 영화 소개를 시작해볼게요.


"이 영화는 예쁘고 멋지게 찍혀서는 안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설거지통 같은 우리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관객이 스스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영화의 주인공은 중학생 손자를 키우며 살고 있는 60대 양미자입니다.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기 시작한 미자는 시 한 편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주변을 관찰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곤 하지요. 형편이 어려운 딸을 대신에 손주를 돌보고, 아픈 노인을 간병하며 돈을 벌고,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되는 등 녹록하지 않은 일상이 이어집니다.


영화는 다른 축의 이야기를 함께 보여주고 있는데요. 집단 성폭력으로 자살한 여중생과 관련된 스토리입니다.(밀양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라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강에서 발견되는 여중생의 체, 짐승처럼 울부짖는 아이의 엄마. 이후 미자의 손주가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가해자 학부모들을 만난 미자는 합의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처해집니다. 그저 시를 한 편 쓰고 싶은 그녀 앞에는 아프고, 잔혹한 현실뿐이네요.


이창동 <시> (2010)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이렇듯 '설거지통 같은 우리의 일상'의 민낯을 그대로 볼 수 있는데요. 그 안에서 시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영화를 보시게 될 분들을 위해 남겨둬야겠지요. 보는 이가 채워야 하는 빈자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미자는 끝내 시 한 편을 써내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글의 말미에서 조금 해보겠습니다. 이제 천천히 각본집을 펼쳐볼까요. 영화와 동일한 <시>라는 제목의 표지에는 윤정희 배우의 쓸쓸한 사진이 있고요. 책은 박준 시인의 추천글로 문을 엽니다.


저는 오늘 글로 쓰인 '시'의 각본을 다시 읽으며 시를 새로 느낍니다. 분명 영화보다 먼저 놓인 것이지만 지금은 영화 너머에 있습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이 아름다움을 당신도 만날 수 있기를.(5쪽)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는 따스한 글을 읽고,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네요. 다시 천천히. 추천사에 이어서 이창동 감독의 말과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영화 시나리오는 처음 읽어보았는데요. 대사를 이룬 문장 사이사이에서 배우들의 표정과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신묘한 경험이었습니다. 영화화된 소설을 읽으면 조금 더 촘촘하게 화자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시나리오를 읽는 일은 머릿속에서 영화를 재생시키는 것 같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읽고 나면 작가 노트와 현장 스틸 사진을 볼 수 있는데요. 이창동 감독의 필체가 그대로 담겨 있어서 신선했고, 윤정희 배우의 스틸 사진은 영화 속 '양미자'를 떠올리게 했어요.(윤정희 배우의 본명이 '손미자'라고 하더라고요.) 감독과 함께 있는 배우, 스텝들과 각종 촬영장비 등등 스크린 바깥의 세계를 담고 있는 사진들은 다소 생경했어요. 그렇게 스틸 사진을 지나면 영화를 좀 더 깊숙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텍스트들을 만나게 되실 거예요.


이창동 각본집 『시』 (아를, 2021) 중에서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이창동 감독 인터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글 그리고 프랑스 시인 클로드 무샤르와 이창동 감독 인터뷰가 그것입니다. 영화에 대한 세심한 질문들이 오간 대담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까지 곱씹어볼 수 있었어요. 작품에 담긴 예술가의 혼을 설핏 감각할 수 있게 해 주었고요. 이어지는 신형철 평론가의 글은 언제나처럼 짙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의 평론에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정확히 쓰여 있곤 해서 자주 매료됩니. 가령 이런 문장들은 그래요.


노년의 여성이 십 대의 소녀가 되는 과정이다. 죽은 이의 마음을 상상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몸 그 자체가 되어가는 일이다.(256~257쪽)


앞선 평론가의 글에서 미자가 써낸 시에 대한 힌트를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자는 성폭행을 겪은 뒤에 자살한 소녀의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시가 낭송되면서 영화가 끝나는데요. 영화와 시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어요. 영화 아니 시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다시 글을 쓰는 지금도 비슷한 기분이 드네요. 이창동 감독이 바랐던 것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언저리에서 오래 머물다 온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도 아름다움의 기척이 전해졌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미자의 시 일부를 남겨둡니다.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아녜스의 노래 부분






* 해당 시구를 글의 제목으로 인용했습니다. 


「꽃 찾으러」, 『기억의 목소리』

매거진의 이전글 꽃봉오리 열리듯 살아오는 내 사람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