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차 인사담당자의 회고
“모든 것은 상호 작용하며 다른 것들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 그 일을 하는 방법, 그리고 왜 그 일을 하는지에 관해 더 철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20세기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디터 람스의 말이다.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자신의 직업을 있게 하고 자신의 디자인의 철학의 기본이 되는 10가지 원칙을 공식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내가 하는 일, 그 일을 하는 방법, 그리고 왜 그 일을 하는가?’에 대해 새삼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자동차 회사 신사업 부문 HR 책임매니저’, 나의 일, 나의 포지션을 간략하게 표면적으로 정의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회사 내에서나 회사 밖에서도 이렇게 내 일을 소개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큼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나열이 나의 일을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은 여전하다. 그러면 나는 나의 일을 어떻게 좀 더 세밀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난 그 일을 왜 하며, 어떻게 하고 있을까?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봄에 라스베이거스를 찾았다. 전 세계에서 온 만 명 넘는 인사 담당자들이 모여 주제 발표도 하고 토의도 하고 상호 교류도 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HR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세션에 참석하여 새로운 인사 기법 사례 설명도 듣고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가장 크게 나를 사로잡았던 단어는 ‘Employee Experience (구성원 경험)’이었다. 새로운 직원이 회사 조직에 입사하여 업무를 하고 성장하다가 조직을 떠나는 일련의 과정을 하나의 여정(Journey)으로 볼 수 있는데, 각 단계에서 구성원들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에 따라 그들의 조직 적응, 업무 성과, 협업, 조직 몰입도, 고용 유지 등에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 주요 메시지였다. 십 년 넘게 인사교육 담당자로 일해 오면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지만, 조직 구성원이라면 느끼게 되는 경험의 과정 전체를 한 발짝 떨어져서 응시할 기회가 되어 더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조직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설렘과 긴장’이란 두 단어가 선명하게 남는다. 기존 구성원들의 반응, 리더의 표정과 말투, 사무실의 분위기와 온도, 이 모든 것들이 일시 정지 화면처럼 박제되듯 머릿속 한편에 고스란히 남는다. 환경과 사람이 모두 낯설다 보니 별로 일한 것도 없는데 퇴근하고 집에만 오면 엄습해오는 피로에 곯아떨어졌던 기억이 아스라이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처음 접한 기존 구성원들의 말과 행동에서, 특히 리더의 말과 행동에서 새로 조직에 들어온 사람은 생각보다 꽤 많은 것들을 읽어낸다. 나를 환영해주는지 아닌지, 서로 위해주는 문화인지 각자도생의 문화인지, 조직의 방향이 명확한지 아닌지 등을 삽시간에 파악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 조직을 살피는 일을 하는 인사 담당자 입장에서는 그 ‘첫 대면의 날’의 경험을 좋게 가져가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일상의 업무들과 반복되는 온보딩 프로세스를 담당자로서 해나가다 보면, 어느덧 ‘그 첫날’은 되풀이되는 무수히 많은 날 가운데 하나로 머물게 된다.
인사 담당자로 일할 수 있게 된 날, 인사실로 배치가 된 그날, 나는 회사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보다 백 배가량 좋았다. 군대 제대 이후 구체적인 진로 탐색을 하던 대학교 3학년 시절, 우연히 HR이란 직무를 알게 되었고 그 직무와 내가 적합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는 주변을 더 돌아보지 않고 이 길을 내 길로 알고 뚜벅뚜벅 걸어왔기에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꿈처럼 느껴졌다. ‘사람과 조직, 그리고 일’에 대해 고민하며, 어떻게 하면 구성원들이 더 만족하며 일할 수 있는 환경과 구조를 만들고, 조직과 적합성이 높은 사람들을 채용하고, 그들의 경력개발 고민을 들어주고 전환배치를 도와주며, 지속적인 성장을 응원하고 지지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일하고자 했다. 마음의 의지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다만, 지난 십여 년을 돌아보면 실제로 그렇게 계속해왔느냐에는 확실하게 ‘예’라고 답하기가 어렵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나 역시 변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변명은 나로서도 납득하기 어렵다. 조직에 적응하며 상사들이 원했던 일들을 해오면서 어쩌면 처음의 의지와 마음을 서서히 잊어갔다는 게 좀 더 정확한 원인 분석이겠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었던 일의 간극에서, 의무의 일들에 파묻혀 내가 의미 두었던 일들을 망각했다.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적절히 타협하고 적응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목적, 그 목적에 부합하는 방법을 저버린다면 결국 나의 소중한 시간과 연봉을 바꾸는 교환 거래만 남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내게 필요했던 건 바로 ‘회고’였다. 지난 3개월을, 지난 1년을,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나는 왜 이 일을 하고자 했느냐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었다.
신체적인 이유로 의사의 꿈을 접고 나서 꽤 오랜 시간 나에게 꿈이 없었다. 그러다가 HR 전문가로 진로의 방향을 잡고 달려올 수 있었던 건, 진로와 경력으로 고민이 많았던 나의 경험을 발판으로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컸다. 한 개인이 성장하면서 진로를 탐색하고, 사회에 진출해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었을 때 다른 무엇보다 큰 보람을 느끼곤 했다. 조직과 구성원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게 인사담당자의 일이기도 하지만, 상충 관계에 놓일 때 구성원의 편에 서고자 노력했다. 상황상 그렇지 못했을 때 느꼈던 괴로움은 다른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타자가 우리 조직의 일원이 되어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지원해주고 응원해주며, 경력개발 상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물꼬를 터주는 일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바로 ‘회고’를 통해서였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도스토옙스키의 말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익숙해진다는 건 적응한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처음을 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뛰어넘고 싶다는 바람이 든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이 일을 하는지, 나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금 떠올릴 때, 회고할 때 비로소 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을 자신에게 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여전히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