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기억' 3편
하나씩 눌러보는 키보드 타건 촉감은 괜히 프로페셔널해 보이기도 하고 멋져보이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스마트폰 브랜드 블랙베리(BlackBerry)는 한때 전 세계 비즈니스맨들의 상징이었습니다.
검은색 하우징에 물리 키보드를 탑재한 디자인, 강력한 보안성과 이메일 중심의 서비스는 블랙베리를 단순한 디바이스를 넘어 '비즈니스 엘리트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블랙베리는 상징성과 함께 존재감도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블랙베리는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겨냥하지 않았습니다.
이 브랜드는 철저히 '업무용 기기', '전문가를 위한 스마트 디바이스'라는 정체성을 고수했습니다.
이메일을 실시간으로 푸시(Push)해주는 서비스, 물리 키보드 기반의 타이핑 편의성, 강력한 암호화 기반의 보안 기능은 당시로선 혁신적인 기술이자 경쟁력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보안성이 강력한 이메일 송수신 기능과 MDM(모바일 디바이스 관리) 솔루션은 금융기관과 대기업, 공공기관에서 폭넓게 채택되며 블랙베리를 업무용 디바이스의 표준처럼 만들었습니다.
블랙베리는 단순한 스마트폰이 아니라, '보안과 신뢰'를 가장 앞세운 B2B 브랜드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블랙베리를 씁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휴대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과 생활 스타일을 대변하는 문장이었습니다.
브랜드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말했던 셈입니다.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은 격변기를 맞습니다.
풀터치 디스플레이와 앱스토어 기반의 사용자 경험은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었고, 블랙베리는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터치스크린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UX/UI 흐름에 적응하는 데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블랙베리는 키보드 기반의 강점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 고집이 브랜드를 고립시켰습니다.
새로운 사용자는 블랙베리의 강점을 체험하기 전에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을 먼저 갖게 되었고, 이는 브랜드 확장의 한계를 의미했습니다.
또 하나의 치명적 요인은 OS 생태계 구축 실패였습니다.
블랙베리는 자체 운영체제(BlackBerry OS)를 고수하며, 애플 iOS나 구글 안드로이드처럼 개발자와 소비자를 동시에 끌어들이는 플랫폼 전략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앱의 다양성, 호환성, 사용성에서 경쟁사에 밀리며 ‘좋은 하드웨어를 가진 닫힌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블랙베리는 이후 몇 차례 반전을 시도합니다.
터치 기반 모델, 안드로이드 OS 탑재, 블랙베리 메신저(BBM)의 크로스 플랫폼화 등.
하지만 이 변화들은 ‘브랜드 철학의 확장’이 아니라 ‘기술 따라잡기’로 비쳐졌습니다.
블랙베리를 선택하던 사람들이 원했던 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블랙베리다움’이었습니다.
브랜드는 정체성을 확장하지 못한 채 점점 흐려졌고, 2016년을 기점으로 블랙베리는 자체 스마트폰 생산을 중단합니다.
이후 라이선스를 통해 중국 TCL 등에서 블랙베리 브랜드 제품을 내놓았지만, 소비자 인식 속 '진짜 블랙베리'는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블랙베리를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사실은 시대가 변할 때 브랜드의 철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전략 없이는 정체성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블랙베리는 '일하는 방식'을 가장 먼저 말한 스마트폰 브랜드였습니다.
이에 집중하여 발전하였다면 블랙베리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브랜드 가치에 대한 전략과 시대 흐름에 맞는 발전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블랙베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기에 역사는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