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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중독자 Jul 13. 2020

내 뼈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내 인생에 끼어든 책 ( 3 )

'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 '라는 문장으로 무수히 많은 잘 쓴 글들에 대한 시기와 열등감과 자괴감과 쓸쓸함과 주저함으로 망설이는 내게 한 줄 위로의 빛을 선사한 이가 있다.

뼈속까지 들어가 쓰라고 부추기는 그녀, 내 뼈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함부로 말하나. 싶다가도 묘하게 위안이 되는 건 뭘까?


내겐 빼어난 미사여구도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특별함이나 직업적 타이틀을 달고 십 년 이상 종사해온 전문성으로 무장한 글감도 없다. 그럼 나 같은 사람은 뭘로 글을 써? 그리고 내 글을 누가 읽어? 사실 후자의 이 질문에 밑줄을 쫙 그어야 한다.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내 뇌에 똥파리처럼 달라붙은 문구는 거다.

' 내 글을 누가 읽어?'

는 내 목소리로 들리다가.  때론  남편의  목소리로 들리다가 어떨 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파장처럼 ' 누가 읽어어어어어'라는 뜻을 강력히 내포한 체 내 귀를 맴돈다.


그녀가 여기서 또 한 마디 하신다.

' 우리는 스스로 게으르며 불안정하고 자기혐오나 두려움에 쌓인 존재, 정말 말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직면하는 순간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때 당신은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을 칠 수 없다는 막 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이제 당신은 별 수 없이 자신의 마음을 종이 위에 풀어놓아햐 하며, 그 가련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말을 경청해야 한다 '

환청처럼 들리던 '누가 읽어어어어'를 한 방에 밀어내는 강력한 처방전 과도 같은 문장이다. 누가 읽어어어어를 핑계 삼아 스스로를 쥐어박던 내게 그녀의 문장은 털어낼 것이 없다면 뼛속까지 내려가서 뭐라도 끄집어 내오라고 조언한다.


내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를 받아쓰던가 뼛속까지 내려가서 글감을 긁어오던가 그렇게 ' 머리로  쓰고, 손으로도 쓰는' 이 지난한 작업이 글쓰기다. 하지만 이 작업은 오래전부터 내가 원하던 행위의 발현일 수도 있다. 무슨 말이냐고? 쉽게 말하면. 글은 종착역과 같은 거다. 그동안의 작업, 독서와 기록의 과정들은 모두  글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다시 그녀의 말을 인용해 보자  ' 진짜 인생은 글 쓰는 행위에 있는 것이지 같은 작품을 몇 년 동안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것에 있지 않다" 이 말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다.  


A와 B가 있다. A는 남자고 B는 여자다. A와 B는 서로 친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감정을 교류하며 지내왔다. 서로 바빠서 연락을 못 할 때도 있었지만 안 보면 궁금하고 때론 보고 싶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아서 A나 B 둘 중에 누구에게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조언과 공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왔다. 그러던 중 A는 B에 대한 감정이 사랑임을 서서히 깨달았다. 비슷한 즈음에 B도 A에 대한 감정의 새로움을 인식하게 되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가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됐다. 두렵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다. 이제 그들의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마침 비가 촉촉이 내리는 아침이다.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일본 향을 한 대 피운다. 향 내가 방안에 은은히 퍼진다.

자주 가던 카페에서 로스팅한 하우스 블랜디 알 커피를 그라인더에 넣고 간다. 커피를 머그잔으로 가득 내려 책상 위에 올려놓고 노트북을 켠다.

유튜브에 독일 출신의 명상 음악가 Deuter를 검색하여 모두 재생을 누른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점심' 대신 '김치찌개'라고 쓴다' 구체적으로 쓰는 글이 훨씬 생동감을 준다는 글쓰기 조언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때로는 평범한 진술만큼 정확한 표현이 없을 때도 있다. 사진을 들여다보듯 하나하나 선명하고 분명한 어휘로 써야 한다'


'라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글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이 있. 나는 이 소설을 무지 사랑했었다. 이 소설을 사랑한 이면에는 문장마다 치기 어린 시절 나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던 문구들이 많았던 탓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 내가 존 파울즈의 [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읽던 해다. 내다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를 세 번째 읽던 해이기도 하다. "

또 있다.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였다. 나는 박상륭의 [죽음의 연구]보다 뛰어나겠나 싶어 이내 호기심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는 ( 위의 소설가 )  '달려라 토끼'가 뭐라고 세 번이나 읽고 '자살의 연구'와 '죽음의 한 연구'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한 카테고리로 있는지 의문이 들지만,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본인의 소설이 어떤 연휴로 표절 시비에 휘말렸고 어쩌다가 자신의  인생을 성범죄자라는 꼬리표를 달며 방치하게 됐는지 묻고 싶다.


일찌감치 구체적으로 쓰기를 터득한 이 영특한 소설가 덕분에 그녀의 말대로 나 또한 "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촉수를 가진 사람'으로 자랐으니 그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사람이며 그의 책 또한 나의 인생에 끼어든 책 목록에 올릴  하다는 생각이 든다.


* B변잡썰


노 희경이 극본을 쓴  ' 그들이 사는 세상 '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몇 회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드라마에는 마감일을 앞두고 작품에 몰두해서 글을 쓰는 작가가 나온다. 작가는  함께 사는 반려견이 글 쓰기를 방해하자. 강아지에게 약을 먹여서 베란다에 재운다. 만약 지금 이 드라마가 방영되었다면 동물 학대로 지탄을 받았겠지만 그때만 해도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미비할 때라 조용히 지나간 듯싶다.  

여하튼 마감을 코 앞에 둔 작가는 아니지만 내게도 글을 방해하는 존재들이 있다.

하나는 80이 다 된 친구 없는 울 엄마다. 아침마다 꼭 같은 시간만 되면 전화를 해서 글 쓰기의 흐름을 깨 주시는.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제발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길~^^

또 하나는 우리 집 강아지다. 아침마다 이슬 먹은 새로운 얼굴을 하고 와서  ' 어서 간식이나 주고 나랑 놀아라'라는 표정으로 덤벼 나의 혼을 쏙 빼놓는다. 그럴 때마다  난 약도 없고 이 놈을 재울 재간도 없다.


유아인이' 나 혼자 산다'는 프로그램에 자신의 집을 소개해서 화제다. 인터뷰하는 장면 뒤로 그가 읽는 책 더미가 살짝 보이던데 이것이 목록이 되어 온라인 서점에 올라와있단다. 대단한 마케팅 효과다. 유아인의 책 목록 중 '그들이 사는 세상'의 대본집이 보인다. 그 외에도 좋은 책이 많이 보여서 어설픈 독서가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유한 책 목록은 그 사람을 말해 준다. 그가 어느 정도 지적이며 따뜻한 감성을 지향하는 사람이고 어떤 이슈에 몰두하고 고민하고 있는지 말이다. 때론 흝어보는 책장 가운데 내개도 의미 있는 책을 발견할 때의 그 기분, 부쩍 상대와 친밀해지는 느낌, 책은 그런 존재다. 말없이 서로를 연결해 주는 강력한 끈과도 같은... 그래서 책을 사랑한다. 그것의 향내와 그것의 표피까지도~



* 참고 문헌


나탈리 골드버그 -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한문화. 2013

박 일문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민음사. 1992

[ 조성일의 글쓰기 충전소 ]. 오마이뉴스. 201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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