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에 빠진 책
내 인생에 끼어든 책 ( 2 )
내 인생에 끼어든 책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결정하자 집 나가서 한량질 하다가 소문 듣고 돌아온 서방처럼 오래된 기억들이 찾아와 나를 들볶는다. 기억이란 오묘하다. 수면 위로는 한 줄 바람이 살랑거리고 물살마저 잔잔한데 수면 아래에 구비구비 꽈리를 틀고 앉아 있는 족히 50년, 어쩌면 그 이전의 삶의 기억들까지도 어디쯤 파 묻혀 있었는지 수면 위로 떠오를 기세다. 난감하다.
난 하찮은 것에 감동을 잘하는 편이다. 하찮다는 말도 어쭙잖긴 하다. 누가 누굴 하찮아한단 말인가?
여하튼 사람들이 죄다 칭찬하고 칭송하는 것들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모두들 웃는 대목이 재밌기보다는 화살처럼 나를 겨냥해 날아오는 웃음코드에 낄낄거리거나 후일 두고두고 되새김질하며 즐거워할 때가 많다. 책도 그렇다. 나만 알아보는 책 나만 알아보는 스토리, 혹은 감성들에 매몰되곤 한다.
초등시절 나를 흔들었던 책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외출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오시더니 방에 있던 내게 굳이 가져다주셨다. 아버지도 나의 B급 정서를 아셨던 걸까? 여하튼 겉에는 만화처럼 주인공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페이지를 펼쳐 보니 제법 두툼한 소설책이었다. 책 제목은 '개구쟁이 나일등' ( 최요안 / 아리랑사/ 1981 ). 지금에 와서 찾아보니 아리랑사에서 발간한 한국 소년 소녀 명작선 집 중 한 권이었다. 난 이 책이 엄마가 사 준 계몽사의 세계명작동화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시리즈인 줄 알았으면 다 사주시지, 어디서 생겼는지 ( 대충 감은 오지만 여기선 굳이 밝히지 않겠다.) 아버지는 이 책 딱 한 권만 주셨다. 난 이 책을 너무 사랑해서 매일매일 읽었다. 밥 먹을 때도 읽고, 똥 쌀 때도 읽고, 앉아서도 읽고 누워서도 읽고 그렇게 주야장천 읽어댔다 그렇게 읽다 보니 책의 표지는 너덜거리고 얼마 안 가서 책이 반으로 쫘악 갈라졌다. 책은 절반인 5대 5로 갈라진 게 아니라 7대 3의 분량으로 갈라졌다. 의도하지 않은 분철에 속은 쓰렸지만 어차피 뒤쪽은 나일등 스토리 외에 단편 하나가 더 실려 있어서 소설의 비중으로 보면 주된 스토리는 앞쪽 7에 다 담겨 있었다. 또한 뒤쪽 3은 결론과 가까워지며 그 흔한 감동 모드로 넘어가는 부분이라 재미는 별로 였다. 재밌는 부분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나는 앞쪽 7을 항상 들고 다녔다.
하지만 불행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불시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날도 앞쪽 7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문제는 그 당시 우리 집 화장실은 지금의 좌변기가 아닌 변소였다. 변소는 '변을 보는 장소'이며 '변이 모여있는 장소'다. 여기에 나의 변을 보태자면 그 당시 서울 변두리 주택들 대부분 변을 보는 장소는 변소였다. 아버지가 국가에서 주는 녹봉을 받는 일을 하시거나 예를 들면 내 친구 아버지는 동네 동장이셨는 데 그 집은 일치감치 마당의 변소를 시멘트로 덮어 버리고 집 안에 있는 목욕탕에 양변기를 들였다. ( 동장 아버지의 지위를 이용한 내 친구의 만행은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소개하겠다 ) 그 변두리 동네에도 강남이 뜨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 들어와 강남 아파트, 콕 짚어 말한다면 은마아파트로 이주하는 친구도 있었다. 마그마가 분출하기 전 지면이 들썩거리듯 어수선했던 80년대에 까짓 거 여유가 있다면 너도 나도 양변기 하나 들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던 시대 아니던가? 문부식의 말 대로 80년대는 '국민들 개개인의 사회적 욕망을 하나로 집약하여 반영한 국가의 욕망'이 발현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골목 안 대부분의 집들은 그냥 변소였다.
여하튼 그날도 변 독 ( 변소 독서 )을 하기 위해 나일등 앞쪽 7과 휴지를 들고 변소에 들어갔다. 볼일을 다 보고 일어서는 순간 나의 작은 손을 비껴나간 책이 '툭' 변 구덩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생긴 일이었다. 내 짧은 팔과 바치 춤을 체 여미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떨어지는 책을 잡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변들 위로 갈매기처럼 책날개를 펼치며 떨어진 책의 하얀색 기둥은 야속하게도 배가 침몰하듯 변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 후로도 나는 나일등 3을 읽으며 7에 대한 아쉬움을 곱씹고는 했다. 처음 책을 가져다 주신 아빠에게 동일한 책을 사달라고 여러 번 조른 듯도 하다. 하지만 그 이후 다시 책을 구입했는지 어쩐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진 않다. 이미 내 여린 속살 같은 감성판에는 나 일등이 새기고 간 정서적 무늬가 선사시대의 벽화처럼 곱고 아름답게 아롱져서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말이다.
고 학년이 되면서 특활 활동으로 도서부에 가입했다. 도서부 활동은 주로 도서관에서 했는 데 나의 국민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은 열악했다. 지금이야 교실 하나로도 모질라 두세 개를 터서 도서관으로 활용하지만, 당시엔 전체 교실의 반 정도의 공간 정도에 책장을 세워 책을 꽂아 놓았다. 그나마 그것도 이 빠진 듯 듬성듬성 꽂혀 있었지만 그래도 그곳에 가면 집에는 없는 다양한 책들이 많아서 도서부 활동이 아니어도 다람쥐 곳간 드나들 듯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나름 '대여 서비스'도 가능해서 도서관 구석에 앉아 책을 읽다가 시간이 늦을라치면 읽던 책을 빌려서 집에 오곤 했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책 한 권을 빌려 집에 돌아왔다. 방에 책가방을 던져두고 TV에서 방영되는 만화 영화를 실컷 보고 저녁밥을 먹었다. 밥도 먹었으니 숙제도 하고 책가방도 챙길 겸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 고이 들어있었다.
그 책은 아동 문학가 강 소천 님의 [ 꿈을 찍는 사진관 ]과 [ 꽃신을 짓는 사람들 ] 등이 함께 실려있던 단편 동화집이었다. ( 강 소천 - 꿈을 찍는 사진관. 1954. 소년 세계 ). 그 책을 잠자기 전 이부자리에서 다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밀려드는 감동으로 마음이 살랑살랑 간지러웠다. 감동을 두 손에 담아 제사장이 제물을 옮기듯 책을 들어 베개 위에 살포시 내려놓던 기억이 난다.
BOOK 변잡썰
좋아하는 소설가 은 희경은 네이버 [ 지금의 나를 만든 서재 ] 은 희경 편에서 첫 번째 추천 책으로 강소천의 [ 꿈을 찍는 사진관 ]을 올려놓았다. 추천 이유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학교 선생님이던 외숙모에게 여섯 권으로 된 강 소천의 전집을 선물 받았고 작가는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 네이버 지서재 중에서
[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 ]의 작가 조 안나는 은 희경을 가리켜 ' 작가는 이제 육십 대가 되었지만, 그녀의 소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아끼는 독자의 입장에서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빛의 과거'와 같은 신간보다 '새의 선물'과 같은 과거의 작품이 난 더 좋다.
몇 년 전 [ 새의 선물 ]을 다시 읽으며 진희가 바라보는 주변인들에 대한 이해와 관계의 밀도를 섬세하게 문장으로 구사해 내는 작가의 필력에 또 한 번 감탄을 했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촉수는 일반인의 그것과 달라서 오감을 넘어선 그 무엇이 무엇이며 그 무엇을 어떻게 고스란히 손을 통해 문장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만약 어린 시절 나 일등이 아니라 진작에 강 소천의 전집을 만나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면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 새의 선물 ]의 진희와도 같은 캐릭터를 구체화 해 낼 수 있는 필력을 전수받았을까? 하는 쓸데없지만 조금은 일리도 있는 생각을 해 본다.
참고 문헌
조 안나 -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 지금 이 책. 2020
네이버 [ 지금의 나를 만든 서재 ] 은 희경 편
강 준만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편. 인물과 사상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