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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솜 Jun 01. 2019

죽었겠지, 어떻게 사니?

독립영화 <콩나물>을 보고 떠오른, 그 날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동네에 배우 이미숙의 외갓집이 있었다. 그 집엔 이미숙의 외할아버지와 오빠 내외, 그리고 여자 조카가 함께 살았는데 이미숙은 그 조카를 참 예뻐했던 모양이다. 시시때때로 고급스러운 '외제' 아동복(검은 벨벳에 하얀 레이스가 달린 롱 드레스, 고급스러운 꽃 자수가 놓인 멜빵 치마, 커다란 리본에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빨간 에나멜 구두 등)을 조카에게 보내왔다. 나와 한 또래인 그 아이의 몸이 조금 커지면 그 옷가지를 내가 물려 입었다. 평소 우리 엄마가 그 집과 살갑게 지낸 덕분이었다.


1990년, 여섯 살 때. 난 우리 집 형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피아노엔 소질도 흥미도 없었다. 그저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오랜 시간 맡길 수 있는 곳 중에 피아노 학원이 그나마 만만한 대안이었을 뿐이다. 여느 날과 같은 날. 학원을 마치고 신나게 가방을 앞뒤로 흔들면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말을 걸어왔다.


"집에 가니?"


짙은 색 청바지에 하얀색 얇은 면티, 마른 몸에 머리는 장발이었다. 얼결에 '네'라고 대답하고 가던 길을 가는데 아저씨가 내 옆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저씨랑 같이 가자."


아저씨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내 얇은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뜨겁고 두꺼운 남자 손이 뒷목에 닿는 순간 '이건 나쁜 일'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어느새 팔뚝까지 붙잡힌 나는 아저씨의 넓은 보폭에 맞춰 끌려가듯 걷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긴 했지만, 이렇게 가다간 점점 더 인적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아있었다. 게다가 우리 집엔 엄마 아빠도 없는데! 세상에 태어난 지 6년밖에 안 된 작은 동물의 본능이 '지금 당장 도망쳐!'라고 경보를 울려댔다.


"아저씨. 우리 집에 아무도 없는데요.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 찾아와야 돼요. 엄마가 저기 저 집에 열쇠를 맡겨놓거든요."


난 눈앞에 보이는 다세대 주택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름이라 현관문을 열어둔 채 대나무 발을 쳐놓은 집이었다.


"열쇠 가지고 나올게요. 여기 앞에서 만나요!"


아저씨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더니 빨리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내 목에 감았던 손을 풀었다.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짐짓 발랄한 걸음으로 생판 모르는 남의 집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는 역시 생판 모르는 아줌마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여섯 살 아이는 그제야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아저씨가.. 모르는 아저씨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줌마는 바로 파출소에 신고했고 곧이어 출동한 경찰 아저씨들과 함께 동네를 몇 바퀴나 돌며 수색했지만, 내 목을 움켜쥐었던 그 장발 아저씨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엄마는 뒤늦게 일터에서 현장으로 달려왔다. 눈물 없기로 유명한 김순옥 여사님은 역시 울지 않았지만, 무척 불안해 보였다. 안절부절못하던 엄마는 나를 아무도 없는 으슥한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치마를 들춰 속옷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한 듯 날 껴안고 긴 한숨을 쉬었다. (이때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이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날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허리까지 닿던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를 남자아이처럼 짧게 잘라줬다. 때마침 이미숙의 외갓집은 이사를 가는 바람에 더 이상 옷을 물려 입을 일도 없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날 찍은 사진 속에 나는 누가 봐도 '아들'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독립영화 <콩나물>을 보고 오랜만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엄마에게 물었다. 만약에 그때 내가 '어떻게 됐다'면 엄마는 어쨌겠냐고.


"죽었겠지. 어떻게 사니?"


아, 엄마에게 나는 '삶' 그 자체 구나. 

가슴이 먹먹해졌다.





https://movie.daum.net/indie/view/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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