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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솜 Jun 14. 2019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홍상수와 안톤 체호프

흑해 연안 크림반도에 위치한 아름다운 휴양지 '얄타(Yalta)'에서 우연히 만난 구로프와 안나. 그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며 사랑에 빠진다. 이 두 사람이 싱글이었다면 흔한 '로맨스 소설'에 그쳤겠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를 집에 둔 채 홀로 낯선 곳을 여행 중인 유부남, 녀였다. 덕분에 이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흥미진진한 '불륜' 이야기가 시작된다.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의 1899년 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24페이지 내내 들끓는 이야기다. 워낙 짧기도 하지만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터라 쉽게, 여러 번 읽었다. 너무 쉽게 읽은 탓이었을까. 책을 읽은 후 내 감상은


'...'


이었다. 안톤 체호프가 '사랑의 민낯'을 묘사하는 솜씨가 탁월한 단편 소설의 대가라는 얘기를 듣고도 어쩐지 심드렁한 마음이 걷히지 않았다.



#1 불륜이 불편한 사람


지난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을 가장 떠들썩하게 했던 연예계 '연애' 스캔들은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배우의 '불륜'이었다. 오늘만 해도 홍상수 감독이 부인 A씨에게 청구한 이혼 소송이 기각됐다는 뉴스가 포털 메인에 걸렸고, 험악한 댓글이 천 개를 넘어가고 있다.


그들은 감독과 주연 배우로 함께 작업한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6)을 발표한 직후, 자신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전 세계에 선언했다. 제67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극찬했고 김민희에게는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이런 성과와는 별개로 국내에서는 연일 그들의 불륜에 촛점을 맞춘 자극적인 기사들만 쏟아졌다.


난 그들의 관계를 지지하지도, 그렇다고 맹렬하게 비난하는 쪽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만의 사생활이라고 선을 긋고 중립적인 입장, 그 어디쯤에 잘 서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홍상수 감독 영화라면 늦지 않게 챙겨보던 내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건너뛰었다. 영화감독과 여배우의 불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이 영화가 픽션이 아닌 '다큐'라고 생각하니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내 마음속 어딘가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 '아무래도 불륜은 불편해'라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은 후에 느낀 감상이 떫떠름하니 미적지근한 온도에 그친 것 또한, 마음속에 이 '불편함 필터'가 작동한 이유인 듯했다. 필터를 거쳐 들어오는 구로프와 안나의 이야기는 심장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머리 어디쯤에서 단어로 분절되어 사그라들었다. 당연하게도 일주일이 넘도록 책에 대한 감상은 한자도 쓰지 못했다. 쓰고 싶고, 써야 하는 이야기가 좀처럼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이 글을 완성하기 위해선 마음속에 있는 '불편함 필터'를 꺼내 들여다봐야 했다. 난 드디어 용기를 내서 '보고 싶어요' 목록에만 겨우 넣어놓고 묵혀놨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플레이했다. 영화가 끝나고 난 확실히 알게 됐다.


내가 불륜을 비난하진 않지만 '불편'해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불편함의 원인을 찾아 이해하려는 의지 없이 그냥 눈을 돌리거나 감는 편리한 방법을 택했던, 그럼 사람이었음을.



#2 불순한 것은 내 마음뿐


영화를 보고 나서 맑은 눈으로 다시 한번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었다. 마치 처음 만나는 이야기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그제야 구로프와 안나의 사랑이 머리를 거쳐 심장에 와 닿았다.


이 소설은 '불륜'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랑'이야기. 

단지 그것뿐이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있고 물리칠 수 있는 감정을 두고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랑은 멀쩡하게 길을 걷다가 갑자기 땅이 꺼져내려 그 안으로 끝없이 '빠지는' 사고다. 때문에 그 시기를 예상할 수 없고 깊이 또한 가늠할 수 없어서, 도망칠 타이밍도 방법도 알 수 없는 것, 자유의지로는 통제가 불가능한 것, 우리는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른다. 누구에게나 이런 사랑이 찾아오지는 않지만, 누구라도 이런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이미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라도 이 사고를 피해 갈 수 없을 뿐이다.


구로프와 안나가 이런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고 체념하는 순간.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순간. 그런 순간들 속에서 휘몰아치면서도 결코 서로를 놓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순간. 그 모든 순간은 그저 '사랑'이었다. 결국 그들은 도둑처럼 숨어 다녀야 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영원히 잡히지도 않을, 실체가 없음에도 삶을 통째로 걸어 버릴 만큼 강렬한 그 '사랑' 때문에.


"그가 왜 결혼을 했고, 그녀가 왜 결혼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두 마리의 암수 철새가 잡혀 각기 다른 새장에서 길러지는 것 같았다." -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본문 중


난 이제 그들의 사랑이 지루한 일상을 탈피하기 위한 잠깐의 '활력소'라고 얕잡거나, '도피처' 정도로 치부할 수 없다. 젊고 예쁜 안나는 이제 막 머리카락이 세기 시작한 중년 남자 구로프에게 금방 싫증을 낼 것이며, 늙고 병든채 혼자 새장에 남겨지는 건 구로프일 것이라고 은근한 악담을 품었던 걸 반성한다. 그들의 사랑은 순수했고,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만이 한없이 불순했음을 고백한다.



#3 진짜로 살 것인가, 끝내 가짜로 살다 죽을 것인가


"사랑하지 못하니까 사는 것에 집착하는 거죠? 진짜 사랑을 못하니까. 그거라도 얻으려고 하는 거죠? 아닌가?... 이해도 못하면서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구.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고 살고 있어요. 다 사랑받을 자격 없어요!"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영희(김민희)의 대사 중


홍상수 감독이 쓰고 김민희 배우의 입에서 나온 이 대사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서 구로프가 말한 공개된 삶(가짜), 은밀한 삶(진짜)과 결이 통한다.


"자신에게는 두 개의 생활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그런 공개된, 상대적 진실과 상대적 거짓으로 가득 찬, 주의 사람들의 삶과 아주 닮은 그런 생활이다. 다른 하나는 은밀하고 흘러가는 생활이다. (중략) 그 속에서라면 그가 진실하고 또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그의 생활의 핵심을 차지하는 그런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없다." -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본문 중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회적인 약속일뿐 사람의 마음까지 영원히 묶어놓을 방도가 없는 비루한 것이다.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얇은 유리막 같은 약속, 그것뿐이다. 가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진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은 과연 옳은 것일까. '진짜'는 자아의 밑바닥에 평생 가둬둔 채 남들 이목 때문에, 혹은 관성에 의해서 '가짜'로 살아가는 것이 맞을까. 그냥저냥 '가짜'에 만족하는 척하면서 '남들처럼' 사는 게, 정말 맞는 걸까.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다. 그 선택으로 인해 오는 모든 '뒷감당'도 각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당사자가 아닌 누구라도 '가짜' 혹은 '진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영희의 말처럼 이해도 못할 거면 그냥 입 좀 조용히 해야 하고, 어설픈 교훈 혹은 훈계 따위를 늘어놓는 대신 안톤 체호프처럼 이야기를 열린 결말로 그냥 두어야 한다.



#4 불편한 생각일수록 들여다보기


일주일이 넘도록 불륜 소설을 읽고, 불륜 영화를 계속 돌려보고 있으니 남편이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다. 이번 글 주제가 불륜이냐고 묻기에,


"사랑 없는 결혼 생활과 진짜 삶에 대한 얘기요."


라고 답해줬더니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을 더 가늘게 뜬다. 내친김에 남편과 마주 앉아서 불륜, 외도,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한참 나누다가 결론을 내렸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 결혼 생활을 끝내야 할 정도로 강렬한 상대가 생기면, 제일 먼저 서로에게 말해주자."


절대로 '가짜'로는 살지 말자는 다짐도 덧붙였다. 이로써 우리의 혼인 서약서에는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옆에 '가짜로는 살지 않고'라는 문장이 하나 추가됐다. 그 뒤는 잘 알다시피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을 서약합니다'로 맺는다.


19세기에 세상에 나온 단 24페이지의 짧은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시작으로 영화 <밤의 혼자 해변에서>까지 보고 나니, 괴사 되어가던 의식의 한 부분에 다시금 말랑한 새 살이 돋아나는 것 같다. 편하고 익숙한 생각을 경계하고 불편한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나름에 답을 찾아가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 과정은 언제나 괴롭고 즐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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