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대충 적당히 열심히 하자.
10년 전, 장승배기에서 친구랑 둘이 자취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때는 젊음이라는 패기(혹은 객기)로 충만할 때라 물불 가리지 않고 일에 몰입했다. 사원 중에 제일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으며, 지하철 안에서는 손잡이 대신 일을 붙들고 있었다. 퇴근 후 집에 와서도 노트북과 기획서 위에 엎어져 쪽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출근하는 게 일상이었다. 제대로 일한다는 것은 그런 거라고 확신했고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몸과 정신을 모두 갈아 넣은 프로젝트가 좋은 성과로 돌아오면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짜릿했다. 20대 청년에게 '성취감'이라는 열매는 황홀하도록 달콤해서 그만큼 중독성도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애를 썼나 싶지만, 그땐 그게 전부였다.
태생이 약골인 데다 급한 프로젝트를 하나 마치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결국 탈이 났다. 밤부터 몸살을 동반한 고열이 시작되면서 새벽 즈음엔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급히 병가를 내고 절절 끓는 머리를 베개 깊숙이 묻었다. 사무적인 답장으로 병가를 윤허하신 대표님에게 '죄송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고 이마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오한으로 몸이 덜덜 떨리고 앞니가 딱딱 부딪혔다. 그 정도로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될 것을 그땐 미련하게 '이러다 낫겠지'하고 버텼다. 약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옷을 꿰어 입고 비적비적 동네 약국으로 향한 건 저녁때가 다 되서였다.
무심한 표정의 할아버지 약사님은 대충 증상을 묻더니 익숙한 몸짓으로 약 두 갑과 쌍화탕 한 병을 내밀었다. 빈속에 먹으면 안 된다는 당부는 기계적이고 건조했다. 약국을 나서면서 집에 먹을만한 게 있을까 떠올려보다가 바로 단념했다. 자취방에 '옵션'으로 놓여있는 작은 냉장고엔 생수, 시어 빠진 김치, 고추장(아니면 된장), 고양이털이 엉긴 먼지가 전부였다. 약을 먹으려면 슈퍼에 들러 뭐라도 입에 넣을 걸 사야 했다.
'우리슈퍼'는 송대관과 헤어스타일이 닮은 주인아저씨 홀로 계산대와 매대를 오가며 바지런히 일하는 작은 가게였다. 그날도 역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저씨를 붙잡고 죽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물기 하나 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아저씨가 안내해준 곳에서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레토르트 죽을 집어 계산대 위에 올렸다. 계산을 마친 아저씨는 검정 비닐봉지를 펼치더니 "이거 가지고 되겠어요?"라는 말과 동시에 계산대 앞에 있던 구운 계란을 봉지에 쏙 집어넣었다. 빨간망에 계란 세알이 조로록 담긴 모양이었다. 그리곤 "잠깐만 있어 봐요."라며 가게 밖 과일 매대에서 큼지막한 사과를 한 개 가져와 또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멍한 얼굴로 서있는 내게 묵직한 비닐봉지를 건넨 아저씨는
"아가씨. 아플 때는 잘 먹어야 돼요."
라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난 고개를 옷 속으로 푸욱 묻으면서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눈에 가득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후두둑 떨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참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독립' 한답시고 집을 나와서 내 몸 하나 못 돌보고 있다는 자책, 왜 하필 바쁠 때 아프고 난리인지 분함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우리슈퍼 아저씨의 안쓰러운 미소가 떠오를 때마다 눈물은 더 굵어졌다. 퉁퉁 부운 눈으로 미지근하게 데운 죽과 구운 계란을 꾸역꾸역 먹고 약을 입 안으로 털어 넣자 금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엔 다행히 몸이 가뿐해져서 아저씨가 챙겨준 사과를 깎아 먹고 출근길에 나섰다. 아직 미열이 있었지만 약을 챙기진 않았다. 약을 먹고 나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이 사건 이후 최선을 다해서 일한다는 건 나에게 무엇을 남기는지 생각해봤다. 100%의 최선이라는 건 어쩌면 내 몸과 정신을 좀먹고 있는 게 아닐까? '일'이 곧 '나'라는 착각은 내가 만든 허상인지, 애사심 따위를 미덕이라고 교육받은 탓인지, 아니면 '가족 같은 회사'를 표방하던 사장님이 내게 인셉션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과 나는 엄연히 별개고 대표가 말하는 '가족'같은 회사라는 건 직원들에겐 가'족' 같은 회사일 가능성이 높을 뿐이었다. 가족은 가족에게 철야 따위 시키지 않는다.
우리슈퍼 아저씨 말처럼 아플 때는 나 자신을 잘 먹이고 무엇보다 그 지경이 되기 전에 충분히 쉬게 해줘야 했다. 일과 나를 분리하고 85%의 최선을 다하되 나머지 15%의 공력은 날 건강하게 돌보고 행복감을 느끼는 일에 써야 했다. 이런 깨달음은 이후 내가 일을 대하는 자세가 됐고 남편과 둘이 직원 없는 자영업을 하고 있는 지금도 유효하다.
얼마 전에 조카가 취직을 했다. 일할 때 필요할 만한 작은 선물을 보냈더니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라는 카톡이 왔길래 '최선까진 하지 말고 대충대충 열심히 해~'라고 답장했다. 빛나는 커리어를 쌓겠다는 꿈으로 부풀어있는 청년에겐 너무 시니컬하게 들렸으려나. 대충대충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리송했으려나. 뭐든 자신이 실제로 겪어봐야 진정 깨닫는 법이고 누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지만, 난 우리 조카를 포함한 많은 청춘들이 되도록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파봐서 그게 어떤 건지 아니까 너는 그만큼 아프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몰골이 엉망인 스물몇 살 '아가씨'에게 사과를 챙겨주던, 우리 슈퍼 아저씨의 마음도 이와 비슷했을까.
지구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면 85%의 최선이면 충분하다-고 난 생각한다. 우리 모두 대충대충 적당히 열심히 하면서 행복하기를, 월요일이 로딩중인 일요일 밤에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