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생각난 건 순전히 식사 자리에서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였다. 그녀는 내가 계간지에 쓰는 영화칼럼을 읽어 주는 독자였고, 마침 다음 호 원고의 꼭지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영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몇 개인가의 영화 제목이 나오다가 2007년 작 '색, 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작년 즈음인가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방구석 1열'에서 이 영화가 소개된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영화관에서 숨 죽이며 영화를 보던 내 모습도, 옆 자리의 친구 모습도 생각이 났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어찌할 수 없는 시대 배경의 애절한 '사랑 영화'였고, 남성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모르겠으나 친구는 영화에 적나라하게 나온 주인공 여자 배우 탕웨이의 체모를 보며 약간은, 불쾌해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탕웨이의 팬이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만추', '시절 인연'을 감명 깊게 보았고, 특히 '만추'에서의 애나 연기가 좋았다. 통통 튀기도 하지만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한 눈동자에서, 가만히 있어도 요염한 자태에서, 그렇다고 밝은 모습이 없지는 않은 그녀는 내게 팔색조 같은 배우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 않을까? 탕웨이의 주연작이 '색, 계'라는 걸. 영화의 주인공 왕치아즈는 평범하고 수수한 여대생이고, 그저 그녀가 수학 하는 시기가 일제 강점기이며 태평양 전쟁 즈음인 1940년대일 뿐이다.
흡사 수미상관 법 같은 영화의 시작은 왕치아즈의 현재이다. 중대한 선택을 앞둔 그녀가, 4년 전을 상상한다. 순박하고 예쁜 왕치아즈는 전장으로 떠나는 학도병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지만 우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물자 부족이 이어지던 일제 강점 말기의 상해에서 홍콩 (은 그 당시 영국령으로 보호받고 있었다)에 있는 대학교로 피난 유학을 온 그녀는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권유로 연극부에 들어간다. 그들의 공연은 사상 주의를 주입한 '저항 (독립) 운동'의 형태로, 동향 중국인들에게 끝까지 일본군에 맞서 싸우자는 내용이다. 첫 연극의 성공은 광위민 (왕리훙 배우분)을 위시한 연극부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동시에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정의감도 생겨버린다. 왕정위 괴뢰 장군 - 아마 일본에 나라를 판 매국노 같은 단체의 수장이 아닐까 -이라는 직책의 이 선생 (량짜오웨이 배우분) 이 홍콩에 온다는 소식을 그의 부하이자 자신의 고향 선배를 통해 듣게 된 광위민은, 연극부원들을 꾀어 이 선생에게 접근해 그를 피살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부원들은 각각 수입상을 하는 막 선생, 막 부인 (탕웨이 배우분), 운전기사 등으로 분해 이 선생의 아내에게 접근하고, 더 나아가 이 선생에게도 덫을 놓으려 한다.
이 시절의 왕치아즈/ 막 부인은 어수룩했다. 교태를 부리며 누군가를 유혹하는 역할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대학생의 모습이었지만, 서서히 그녀가 막 부인 역할 위해 치파오를 맞춰 입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며, 그녀의 태도 또한 달라지게 된다.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하는 이 선생이 자신을 가지기라도 하면 계획이 발각될까, 같은 연극 부원인 리앙과 초야까지 치러버리는 왕치아즈. 그녀에게 신념이라는 건, 몸을 내던져 버릴 만한 것이었을까? 그녀와 학생 때부터 서로 호감을 가지던 광위민은 리앙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선택의 순간에 대의를 따르는 척 그녀를 외면한다. 왕리훙이라는 배우의 실제 이혼 스캔들이 없었다면, 광위민 역할은 좀 덜 얄미웠을까. 홍콩에서의 첫 번째 시도가 좌절되고 치아즈는 순결을 잃은 채 상해의 친척집으로 도피, 다시 대학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로부터 3년 뒤, 어색하게 정의감을 앞세우던 광위민 일행은 진짜로 저항군 (독립군)에 들어가서, 우 영감이라는 사람 밑에서 다시 한번 이 선생을 제거하자는 계획을 위해 왕치아즈를 찾는다. 지난 3년 간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지 모를 그녀는, 광위민을 내치지 않고 흔쾌히 역할에 동조하며 정식 스파이 교육을 받기에 이른다. 우 영감은 그녀에게 거사가 끝난 뒤 아버지가 사는 영국으로의 망명을 약속했지만, 사실 그건 핑계에 다름 아니었다. 이 시절의 독립열사들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쏟아부어지는, 총탄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그들의 대의와, 진실이 조각조각 모여 큰 결과를 이루어 냈겠지만, 그 하나하나의 청춘들을 비추어보면 가련하다.
이번에야말로 좀 더 대담한 막 부인으로 변한 탕웨이 배우는, 이 선생과의 첫 번째 정사를 끝내고 오묘하게 웃는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 선생은 그녀를 결박하고 마음대로 유린했다. 하지만 그녀가 웃는 이유는 욕망을 채웠기 때문일지, 아니면 자신의 임무를 이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탕웨이라는 배우는 대본의 디테일이 없는 정사 신에서 진짜 '막 부인' 역 속으로 들어가 연기를 한 것 같다. 량짜오웨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막 부인 - 이 선생을 연기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임팩트는 없었을 것 같다. (마치, 이안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주인공 역에 다른 배우들을 상상할 수 없듯이)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색정에 빠진 두 사람. 막 부인을 집어삼킬 것 같은 이 선생의 눈빛은 그녀의 눈동자에 '두려움'을 심어 놓기에 이른다. 그녀는 점차 임무를 잊고, 그를 해칠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에게 동요하며, 동시에 이 선생의 와이프에게도 들킬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따라서 저항군 동지들에게 좀 더 빠른 거사를 치르자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선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저항군들 중에는 자신의 군사학교 동기도 있었다면서, 감시 속에 둘러 싸여 사람을 믿지 못하는 그이지만, 정사를 통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만 두 사람은 현실 속 역할을 잊고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들의 사랑이 정점에 이른 건, 일본인들과 간부들만 출입할 수 있는 일본 조계지에 이 선생이 왕치아즈를 초대한 날, 그들이 요정에서 만난 날의 장면이다. 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군들은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동족을 심문하던 이 선생의 마음은 어땠을까 싶다. 요정의 게이샤들이 부르는 노래가 별로라며 왕치아즈가 부르는 중국 방언으로 된 노래. 바늘과 실처럼 당신이 가는 곳에 따라가겠다며,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며, 당신이 나의 영혼의 동반자라며 노래하는 왕치아즈의 진심 어린 모습에 - 그 순간만은 진심이 아니었을까? - 이 선생은 눈물을 짓는다. 진정으로 위로받은 사람에게 감사하는 눈물인 것 같다. 깊은 우수에 찬 눈동자도, 화가 난 표정도 아름답지만 이 배우 량짜오웨이는 우는 모습도 아름답다.
영화는 처음으로 돌아온다. 막 부인은 광둥어로 동지들에게 지령을 내리고, 거사의 장소로 향한다. 그녀가 택한 장소는, 이 선생이 그녀에게 선물하는 다이아몬드 반지의 세팅이 끝나 그걸 찾으러 가는 보석상이었다.
커다란 분홍색 다이아몬드 옆으로 화려하게 세팅된 반지를 가운데 손가락에 낀 막 부인, 아니, 왕치아즈는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며 누가 뺏어가면 어쩌냐고 걱정을 한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을 빤히 본다. 마치 몇 분 후 일어날 일에 대해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이 선생은 말한다.
'워껀니짜이이치 (너랑 나는 함께야, 즉, 지켜주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반지를 낀 그녀의 손이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모든 의심을 버리고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의, 막 부인 앞에서는 한 없이 무력한 사람 그 자체의 것이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찰나.
'콰이취 (빨리 가요)'
막 부인은 조용히 그에게 말한다. 처음 그녀가 말했을 때 이 선생은 이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두 번째 나지막한 막 부인의 말에 눈빛이 변한 그는 그 자리를 쏜쌀같이 뜬다. 연인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으로 향해 보지만.. 바람개비가 달린 인력거를 타고 어디로 가느냐는 인력꾼의 말에 막부인은 집으로 가는 거라고 한다. 퍼거슨 가는 그들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의 이 선생은, 아니 량짜오웨이라는 배우의 눈빛은 압권이었다. 주름이 진 침대 위를 뜨며 방의 불을 끄는 그, 그녀가 사라진 그의 세상에서 미아가 된 것처럼. 연극 무대에 선 그날 왕치아즈가 저항군 동지들과 신념의 맹세를 하지 않았던 들, 그들은 서로 만나서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에게는 너무 가혹한 시대의 형벌 같은 색, 계였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목숨을 바쳐가며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그들은 마지막의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꿈을 꾸었을까?
이 선생 앞에 돌아온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그는 싸늘한 말투로 냉정하게 말한다.
'부스 워더 (내 것이 아니야)'
사랑은 그렇게, 전쟁처럼, 상처처럼, 불꽃처럼 왔다가 사라졌다. 수많은 목숨과 신념이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과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내가 살았던 모든 곳이 상처 위에 재건된 곳이었구나 싶었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부를 이룩하며 살았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후 다시 세상의 모든 대륙이 요동치는 느낌을 받는다. 변화의 계절 속에서 나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지, 나는 잠시 고민해 봤다. 15년이 흘러 다시 감상한 이 영화는 여전히, 가공할 만한 매력이 있었다. 탕웨이 주연의 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 (2021)' 도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