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사이트 검색을 해서 찾아보니 3-12세 사이에 급격히 자라면서 하반신의 무릎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이라고 한다. 나는 이제껏 이 단어가 사회심리적인 성장을 하며 느끼는 마음의 자람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새삼 쓰임이 다양한 단어인 것 같다. 학창 시절 속 있었을 나의 수많은 실수와 서투름을 꽤 아름답고 애잔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자주 쓰고는 했었는데.
나의 학창 시절을 통틀어 돌이켜보면, 어린아이들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나는 특히 대인관계에 있어서 참 서투르기 그지없는 아이 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나는 동네에서 친구들과 잘 뛰어놀다가도 작은 다툼이나 내 부탁에 대해 거절을 듣게 되면,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해 혼자 사라져 버릴 생각을 꽤 자주 했었다. 그 시절에 찍은 사진 몇몇은 뿌루퉁하게 화가 나 있거나, 멍하게 있는 사진들이 꽤 많달까. (이건 유아기 이후 기억이 있는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왔는데 부모님이 나의 동의 없이 내다 버린 인형들의 빈자리를 보고 화가 나서 방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엎어버린 일도 있다. 열 살 이전의 기억인데 감정들이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면, 난 화를 내는 방법을 모르는 채 착한 아이여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콤플렉스에 스스로 사로잡혀 커온 것 같다. 참고 참다가 폭발해 버리는 에너지를 십 대 때는 어디에 쏟아야 할지 모르고 방황했다는 것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니까. 이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크는 것 같다.
나의 십 대, 학창 시절. 울분을 안고 자란 나는 마이마이와 팝송에 빠져 영어를 배울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마음 붙이고 공부해 보려 했던 중학교 1학년초창기 때부터 원치 않았던 총 네 번의 전학과 (부모님의 전근으로 나라가 바뀌는 경험까지 했고 이것으로 인해 친해진 친구들과 헤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된다), 언어, 학업 그리고 입시 스트레스까지. 그 시절의 나는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이 견뎠던 것 같다. 그때는 혼자서 듣는 음악이 가장 큰 위로였다. 동시대의 음악을 통해 친구를 사귀는 것도 가능했었다. 그 친구들 중 몇몇은 아직도주변에서 내 인생을 지지해주고 있어 참으로 감사하다.
그 시절을 버텨낸 경험의 장점이라면 굳게 닫힌 네모 반듯한 '나'를 깎을 수 있는 마찰들이 있었던 것이고, 단점은 그런 순간들마다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게 너무 더뎠다는 것이다. 내가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모르는 채 학교 생활을 하기 위한 '감정의 진공 상태' 속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일은 참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트라우마가 있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오랫동안 머무른다고 하는데, 내가 스스로 만든 트라우마는 참 많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어야 할 사춘기 시절에 '감정을 숨기고 버티자'는 다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의 기대와 나의 호승심 속에 내가 원하는 대입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내 마음대로 여행을 다니고 싶었고, 공연을 보러 세계 일주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게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나를 버티게 했고, 그것을 이유로 아주 오랫동안 나를 열여섯일곱의 마음으로 살게 하였다. 마음에는 울분이 있지만 괜찮은 척 버티며 웃는 아이로 말이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많은 순간들에, 뻔히 보일지도 모르는 거짓말을 해 가면서, 혼자서 담배를 배웠고 밤에는 술을 마시고 잠을 잤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이없는 상황이긴 한데, 모범생의 탈을 쓰고 학교를 잘 다니니까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건 옳은 일이었을까? 나는 내가 나를 책임지고 결과를 이뤄내면 된다고 믿었지만, 뭐래도 나는 미성년자였는데.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일상의 행복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를 멀리하고 나를 잘 설득해서 대학까지는 갔는데, 그다음에는 대인관계에서 연애가 가장 어렵게 다가왔다. 수없이 만나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내 감정도, 상대의 감정도 모르겠고, 누가 좋아져도 내 표현은 더 서툴고, 열정만은 가득해서. 어쩌다가 급진전된 관계에서 상대에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 정도의 맹목적인 사랑도 두어 번은 해 봤지만 모두 끝이 좋지는 않았다. 심지어 나는 대학교 다니면서 3년 동안 공강시간에 도서관에서 일을 하며 책을 읽었지만, 이런 건 책에서 가르쳐 줄 리 없는 일이었는걸. 책과 음악은 간접 경험이긴 하나 판타지 속인 걸. 대인관계의 역동은 자라면서 배웠어야 하는 건데. 몸과 마음에 성장통을 느끼던 어느 순간에 나는 이걸 포기해 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매번 반쪽짜리 사랑이 더 편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인지 막상 돌이켜보면 예쁜 추억들도 많았을, 내 학창 시절이라는 표지를 보면.. 마음 한편이 여전히 아프다. 너무 서툴고 순수한 내가 거기에 박제된 채, 웃으며 울고 있는 게 여전히 아프다.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야 할 중년의 나이가 되어가면서도.. 그 시절의 내 마음은 아직도 울고 있을 때가 많다는 걸 느낀다.
내 속에 있는 아이의 필요에 의해 20대 후반에 시작한 심리학 공부는 그래서, 30대에는 좌절되었지만, 40대가 된 지금 다시 시작해서 조금씩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결혼을 해서 자식을 가지면, 혹시 나처럼 생각이 복잡한 딸이 나올까 봐 십 대 때부터 걱정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40대가 되어 청소년 발달 심리 같은 과목을 들으면, 나는 내 또래가 가질 수 있을 자녀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자란 청소년 시기의 나를 대입해서 내 안에 있는 아이를 위로하고, 타이르는 중이다. 그 작업은 나름 매우 의미가 있다.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 안의 아이는 영원히 자라지 않지만, 잘 데리고 살아갈 수는 있다는 걸. 감정이 올라오면, 한 번씩 그 아이를 위해 울어주기도 한다. 20-30대에는 꽤 잦았지만, 40대가 되니 드문드문해졌다. 이것도 나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밤에 트라우마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늘 나를 위무하는 글을 써 독자분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혹시라도 어른아이의 성장통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 괜찮다, 괜찮다 심심한 위로를 드리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