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life tells you to move on
Let your intention sets you forward
정해진 시간에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 잠이 스르르 든다. 이상적인 밤의 풍경이다. 짧은 여름휴가를 미리 다녀온 지 한 달 밖에 안 지났는데, 수면 사이클이며 내 건강이며 엉망이다. 회사 다녀와서 화장도 못 지우고 자는 날은 최악인데, 친구의 초대로 한 잔 한 금요일에 기어코 탈이 났다. 몸이 이제는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서, 방종을 좀 그만하라고 보내는 사인이 있다. 이번엔 두드러기가 돋기 시작했다.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할까? 혼자서 산 지 오래되고 가족들도 멀리 있으니 내게는 signifcant others (중요한 타인들 - 가족에 준하는)가 결여된 삶이라 사회적/정신적으로 친구들을 의지하고 살기는 하지만, 가끔 응당 있어야 할 그가 내 인생에 없으니 생기는 문제들이 종종 있다. 첫째, 회사나 사회기관에서 호구 조사를 해야 할 때 서로 어색한 침묵이 있을 때가 있고, 둘째, 몸이 아플 때 움직일 수 없으니 불편한 것, 그리고 셋째, 친한 친구들 이건만 그들에게 중요한 타인 대신이 되어주어야 할 때. 셋째를 말하면 냉혈한 같을 수 있는데, 나는 혼자가 된 후에 나 자신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생각보다 감정적으로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흔들리며 자라올 때는 몰랐다. 나는 내가 많이 유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열정에 치여 지금 생각해 보면 이불 차게 되는 창피한 순간들도 꽤나 많이 기억 속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내가 느끼는 것을 오롯이 껴안아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 꼭 감정들을 주변에 다 표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알아차려 주는 것만으로 꽤 많은 것들이 해소된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문제는 주변에 친한 친구들이 아직 그만큼 감정적으로 바로 서지 못했을 때, 내게 기대 왔을 때 - 이기적이기게도 나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위로가 뭔지 알 것 같지만 - 공감과 위로를 해주면서도 지치는 나를 발견할 때이다. 삶이 빡빡하게 돌아가다 보면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차오를 때가 많다. 이미 그것만으로 흘러넘쳐서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을 비우려고 나름의 노력을 한다. 그래서 내 친구들이 같은 노력을 나름 했으면 하고 바란다.
내가 겪은 아픔을 비슷하게 겪는 사람들을 보면, 받아들이는 방식이 제각각 다른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적어도 많은 길 돌아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게 그들에게 진심 어린 충고는 해 주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나를 지켜야 하기에 그들로 하여금 나에게 완전히 의지하게 할 수는 없다. 타인을 완전히 책임질 수 없다면 그렇게 길들이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 이상하게도 내게는 마음이 아픈 이들이 가지는 감정들이 아주 잘 느껴진다. 때문에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내게서 엄마나 성인을 바란 지인들도 많았다. 모든 관계는 일방적이어서는 유지되지 않는데, 한때는 나도 내가 희생하면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바보처럼 믿었던 적도 있을 정도니까.. 당연히 그 끝은 찬란한 이별들이었다.
언제가 내가 존경하는 종교인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를 힘들게 하는 모두가 너의 스승이라'라고. 일하면서 어떤 사람이 보기 싫었다면, 그는 내가 가지지 못한 태도나 환경을 가지고 있는 적도 있었다. 외로움을 탄다고 노래하는 친구가 있었다면, 나는 그나 그녀에게서 일부러 한 발짝 떨어져서 스스로 마음의 근육을 좀 키우라고 다그쳤던 적도 있다. 온전히 누군가를 책임지는 경험을 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리고 나는 후자의 방법이 궁극적으로는 친구에게 좋은 것이라고 판단했으므로. 동등한 관계가 되어 소통하는 것은 이상적인 일일 뿐일까? 감정을 소통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과해지면 힘이 든다는 걸 배운 주말이었다. 어린 날의 열정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지만 내가 나를 지키려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나를 발견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중요한 건 내 마음과 감정을 들여다보며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