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잘하던 아이 1

중-고등학교 5번의 전학 중

by 장서율

내가 처음 비행기에 오른 것은 1994년의 5월 어느 날이었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일이 흔치 않았음을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다시금 깨달았는데, 아버지 회사의 전근으로 가족이 다 같이 홍콩으로 이주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제법 공부를 잘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중학교에 갓 입학해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학교 생활에 재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또 중학생 권장 도서 100선 같은 건 국민학교 4-5학년 때 다 읽고 난 다음이라, 중학생이 되면 얼마나 더 재미있는 책들을 접할 수 있을까 나름 기대에 차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해외에 나가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엄한 집안 환경 속에서 내게 그런 선택권은 없었다. 우리 아버지 사전에 가족은 '늘 함께'여야 했다. 해외에 나가서 내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졸랐던 것은 한글로 된 문학전집을 사 달라는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다른 주재원 가정에서 '세로 쓰기'로 된 전집을 얻어다 주셨다.


덥고 습한 나머지 집안에 '제습기'가 필수였던 홍콩의 사택은, 전임자의 관리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첫날에는 쥐가, 그다음 날에는 바퀴벌레가, 그리고 일주일 지나서는 전집을 꽂아가며 책정리를 시작한 내 책장에 개미떼가 꼬였다. 자려고 누워서 아버지랑 동생이 슬리퍼로 그것들을 때려죽이던 소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 해외 전학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몰랐던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은 한국 학교에서 떼어 온 서류들을 들고 홍콩에 도착한 지 정확히 열흘 째 되는 날에 한인 사회를 수소문해 찾은 '영어를 잘 못해도 받아주는 국제학교'에 등록을 했다. 학교를 등록하고 사택으로 올라오던 비탈길에는 재래식 시장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는 자라목을 따서 빨대를 꽂고 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았다. 개고기를 먹기 위해 잡기 전에 쳇바퀴를 타게 하는 가게도 보았다. 홍콩에서 쓰는 광둥어는 중국어 표준어인 만다린과 달리 성조가 6개나 된다. 그 우악스럽고 시끄럽고 더웠던 홍콩에서의 첫 몇 개월동안, 우리 가족은 서로가 동지였다. 새로운 문화에 각자가 적응해 나가는 몫을 가진 동지들 말이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엄마는 시장을 보면서, 나와 동생은 학교에서 각자의 전쟁을 계속했다.


전학하고 다닌 학교에 들어간 지 두 달 정도 후에 시험을 볼 때, 영어의 읽고 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다. 영어 말문이 트인 건 생수 배달을 하던 아저씨가 집에 와서, 백화점에서 구매한 영수증이랑 배달한 박스의 개수가 맞지 않는 걸 따지면서부터였다. 홍콩 도착하고 네 달쯤 지났을 때였다. 그때부터 엄마는 그런 내게 많이 의지하셨다. 그렇게 1년 뒤 - 1995년의 나는 민중서림에서 나온 영한사전을 놓고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두꺼운 안경, 또래보다 제법 키가 크고 수줍음도 많던 아이가 가장 자신감이 생겼던 순간은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느껴지던 때였다. 국민학교 6년 내내 반장을 놓치지 않았던, 엄마가 굳이 공부하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음 날 책가방을 싸 두던 아이가 바로 나였기에. 하지만 나는 늘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있어서 일기장을 벗 삼아 6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항상 많았지만 누구에게 털어놓아야 할지 몰랐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한 동안 괴로웠던 것은 한글처럼 자유로운 글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영한사전을 펴 놓고 큰 별 표시 3개가 있는 단어를 A부터 적어 외우려고 하다가 G 쯤에 포기할 즈음. 엄마가 여기저기 과외 선생님을 붙여주신 덕에 문법이 더 편해졌다. 1년쯤 지난 이 시점에서는 영어로 에세이를 쓰는 것이 두렵지 않아 졌다. 나는 'stand up'이라는 숙어를 깨우친 순간이 지금도 생각나는데, 크게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는 것처럼 'stand up!'을 영국인 과외 선생님에게 외쳤다가 'I beg your pardon?'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배움은 말의 물꼬가 트이자 재미있어졌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스스로 더 좋은 환경으로 전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어떻게 찾은 건지 잊었으나 시설이 좋고 명망 있는 국제학교로 입학시험을 보러 다녔다.


1995년 6월께에 입학이 확정된 영국계 국제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까지 받았지만,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은 중국어를 제2 외국어로 가르치는 국제학교였다. 마음속의 2 지망이었던 그 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나는 내가 제일 가고 싶었던 학교의 입학실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마음으로 책자에 나온 입학처 전화번호를 눌러, 교장선생님과 통화하고 싶다고 말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단순히 '반드시 저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하나뿐이었던 것 같다. 교장선생님은 '왜 입학시험 결과를 입학일까지 알려주지 않아서 내게 기다림과 혼란을 주냐'는 당돌한 한국인 여학생에게, 껄껄 웃으며 다음 날 학교에 나오라고 허락해 주셨다. 나는 그렇게 당당히 사복을 입고 하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 섰다. 교복과 교과서를 어디서 구매하는지도, 교내 식당이 어디 있는지도, 등록금은 어디에 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내가 좋아하던 파란색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에나멜 구두를 신고 소풍 가듯이 그렇게 나의 꿈의 학교에 입학했다. 중학 과정이 이었도, 대학교 마냥 사물함에 물건을 두고 교실을 이동해야 하는 시스템 속에 첫날이 어떻게 흘러갔고 나는 어떻게 하교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느꼈던 감정은 혼자서 원하는 것을 이뤘다는 '성취감'이었던 것 같다.


홍콩에서도 알아주는 재벌/갑부들 자제가 다닌다던 그 학교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텃세를 느끼기도 했고, 인생에 둘도 없는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아직은 부모님의 지도가 필요했던 열네댓 나이에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을 텐데도, 내게는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지식의 원동력으로 삼는 일은 누구도 내게서 가져갈 수 없는, 고귀한 경험이었으니까.


추신 : 소설의 형태로 쓰려던 것을 에세이로 전환했습니다.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일 수 있으니까요.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