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잘 하던 아이 2

홍콩과 싱가포르의 접점

by 장서율

일본식 '세로 쓰기'로 된 문학 전집 읽기를 포기하고, '적과 흑' '싯다르타' 등의 고전은 동경만 한 채로 영어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한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전학한 국제학교 시스템은 몇 가지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영국제' 제도였는데, 역시나 마이웨이였던 나는 원어민도 힘들어하는 역사(History) 과목을 지리(Geography) 대신 선택했다. 이유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까? 아버지는 역사학과를 졸업하시고 회사원이 되신 분이었는데, 종종 내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걸 좋아하셨다. '하다가 잘 모르면 아버지한테 여쭤보면 되지!'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나. 역사 수업에 처음 들어간 날 크고 두꺼운 영어책 챕터 1에는 파리 베르사유 조약에 관한 내용들이 적혀있었는데, 그로 인해 열강들이 세계 대전에 얽히게 된 배경이 그 주였다. 챕터 1을 마치고 나면 쪽지 시험처럼 서술형 시험이나 숙제가 이어졌고, 대부분 문제는 단 한 줄, 숙제 제출은 에세이의 형식으로 A4 두세 장은 채워야 했다. 여기에서 나는 내가 국민학교 시절 읽었던 독서량만으로는 절대 빈약할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유튜브와 챗 지피티도 없던 시절에 아버지의 사견을 빌려 교과서를 읽어가며 힘겹게 - 그러나 즐겁게 - 에세이를 적어나갔다. 그렇게 형식에 맞게 글을 쓰는 훈련을 영어로 하게 된 것은 큰 자산이 되었다.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지금까지도 - 한글로 된 업무 이메일보다 영어로 된 업무 이메일이 더 익숙한 것도 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 돌이켜 보면, 그때 미처 다하지 못한 독서에 대한 부족함이 남아 늦게나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등을 탐독 중이다. 인생은 이렇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퍼즐 같고, 그래서 재미나다. 이렇게 나를 찾아가는 시간들은 문학 시간으로 이어졌다.


문학, 그러니까 원어민이 아닌 제2 언어로 영어를 하는 학생들의 문학 시간은 내가 1주일 내내 너무나 기다리던 수업이었다. 그때 읽은 '파리대왕'이나 '햄릿', '멋진 신세계'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문장들 몇 개를 통으로 기억할 만큼, 뇌리에 남아있다. 문학 선생님은 당근을 간식으로 자주 드시던 짧은 머리의 여선생님이었는데, 그녀가 너무 좋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문학 수업의 주제, 또는 화두로 시와 영화가 자주 등장했던 것. 창작시와 산문을 써내면, 꼭 나를 독려하시면서 이 원고들을 보관했다가 10년, 20년, 또 먼 훗날 읽어보라고 하셨던 것. 내가 시를 써 내려갈 때면 반드시 '저 아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잔인하리만치 솔직해져서 글을 쓰라'라고 반복해 말씀해 주셨던 것. 그녀의 말들은 보석처럼 내 가슴에 와서 박혔다. 틀에 박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들을 꺼내 보라고 말씀해 주신, 그게 그대로 '너 자신'이라고 알려주신 소중한 분이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매일 일기장에 입학 초기 따돌림, 텃세, 사춘기 문제 같은 것을 토로하던 내가 점점 밝아져 간 것은 사라 선생님의 영향이 매우 컸다. 가끔 삼삼오오 앉은 책상마다 자리를 바꿔야 한다며 문학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던 날에는, 갑자기 '누구 노래 부를 사람 있냐'라고 물어보시는 거였다. 나는 번쩍 손을 들어 유행하던 팝송을 크게 불렀고, 아이들은 나의 노랫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자리를 이동하기도 했다. 참으로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수업을 받던 우리들 가운데에, 이 수업에서 만난 내 친구 A도 내 인생에 매우 큰 영향력을 선사했다.


자유로움. 속박이 없는 학습 환경은 나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게 해 주었다. 원래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것도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처치에 있는 친구들을 사귀면서 한국이 아닌 아시아의 범주로 묶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같은 듯 다른 주변국들에도 관심이 쏠렸다. 일본인과 중국인, 홍콩인 (지금은 중국이지만 그때는 반환 전의 영국령 특별 자치구였다) 친구들의 영향으로 인해 하나의 외국어를 마스터하는 일은 하나의 문화를 익히는 것이구나 느낄 때쯤, 외골수 같던 내게도 A를 비롯한 친한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성향은 나와 비슷한 이들이 위주였고,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을 새기며 이 학교에 입학 후 1년쯤 지나자 몸과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행복했다. 적응과 안도감, 소외감을 느낄 새 없던 단체생활은,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나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홍콩 로컬 친구들의 텃세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국민학교- 중학교 두 번의 전학을 거치면서 초반에는 혼자서 사색하고 글을 쓰던 습관이 처음의 외로움과 혼란을 견디게 해 주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와 친구 A는, 지금도 해외에서 생활하며 우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우리는 알지 못했다. 우리의 몸속에는 한반도인의 잠재력을 넘은 잡초근성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살아남는 것이 당연한 이국에서 어릴 때부터 감각이 훈련되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 속에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강국, 한국인. 이러한 면모는 그 당시에는 없었다.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쇄국 정책을 펼치던 흥선 대원군 시절 마냥, 6.25가 끝나 열강들 사이에서 미국의 원조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베트남 전쟁 파견 - 새마을 전쟁 - 독재 정권을 지나 민주주의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나와 내 친구 A는 태어났다. 우리 부모님들이 민주주의 초기에서 제법 자유롭고 특별한 환경 속에 우리를 키우실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이나 나의 머릿속에 박힌 유교 사상 혹은 근대 정권이나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틈 사이에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며 혼란한 사춘기를 보냈으며, 거기에 밀레니엄 직전 마지막으로 빛나던 홍콩의 모습이 겹쳐졌다. 2025년 지금의 싱가포르와 홍콩의 시절이 머릿속에서 교차하는 계기는 최근에 봤던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 ' 때문이기도 하다. 지존파 사건과 성수대교 붕괴, 삼풍 백화점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인터넷이 없었기에 나는 뉴스를 신문으로만 접해야 했었다. 아버지가 퇴근 때 가져다주시는 신문을 읽으며 참담하기도 했고, 학교 물리 시간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한국은 어떻게 다리를 지었기에 붕괴가 되냐'는 말씀을 듣고 매우 창피했던 몇몇의 기억이 있으니까. 그때의 자료들을 생생한 화면으로 보는 것은 이질적인 경험이다. 90년대 중반의 한국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시대적으로는 열강들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민초들의 힘으로 일궈낸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2025년 지금 이 다큐를 보면, 컨트롤 타워나 정권의 힘 없이 오로지 살아남은 이들의 경험과 말로, 또 그들을 구하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격변의 시대에 홍콩에 있었던 우리들은, 폭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지붕이 튼튼한 집에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개개인이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점에서는 유리로 된 벽 속에서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가 깨이고, 마음이 열리고 세상의 이치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쯤에 내가 가졌던 유리 천장이라는 게 얼마나 견고한 것이었나를 깨닫는 데는 몇십 년이 걸렸었으니까. 바꿔 말해 홍콩에서의 성취감은 나에게 싱가포르라는 유사 문화권으로 이직을 하도록 만든 큰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많은 시도와 좌절이 있었는데, 다음 화에서는 그것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풀어나가도록 해보려 한다.


추신 : 글의 시제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은 그때의 경험이 모여 지금의 제가 이뤄졌다는 것을 살면서 계속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혼란스러우시다면 의견 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항상 잘하던 아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