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냄새 9

나팔바지와 프링글스

by 장서율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1960-70년대에 자란 세대들답게 미국의 문화 (음악과 영화, 패션 등)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느낄 수 있다. 1980년대 생인 나는, 90년대 - 더 정확히는 IMF이전의- 부츠컷 바지, 소위 나팔바지가 매우 유행했던 시절에 학창시절을 맞았다. 잠뱅이, 닉스, 스톰 등등 브랜드 너나 할 것 없이 허벅지는 꽉 조이고 무릎 아래로는 펼쳐지는 청바지들을 당시 가격으로 15-20만 원 정도에 팔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밀레니엄 세대들은 어떤 옷에 열광했을까. 그때의 시대는 암울함과 설렘이 같이 공존했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유행하는 아이템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입고 싶은 옷들을 입기 시작했다. 은색 레쟈 (leather의 일본식 발음. 가피를 일컫는 말) 나팔바지부터 시작해서 락클럽 전용 반짝이 의상, 뒤가 깊게 파인 베르사체 원피스를 할인해서 산다거나 일본 하라주쿠 역 앞에서 유행하던 패션템을 그대로 서울에 들고 와서 입고는 했다. 나는 그 시절에 흔치 않았던 호피무늬 초경량 우산이라던가, 무지개색 니삭스, 락밴드 기타리스트가 입을 법한 구멍이 숭숭 뚫린 니트까지 실로 다양한 아이템의 보유자였기에 그것들을 입고 캠퍼스에 나타나서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면, 그녀들은 나를 본체만 체 지나쳐가고는 했다.


'서율아, 창피해! 나 아는 척하지 마!'라며 웃었다.


그래도 그 시절의 나는 즐거웠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것 같은 행복감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음악 공동체가 있고, 남들이 향유하지 않는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그런 게토 문화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속이고 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은 커뮤니티들이 꽤 있었다. 나는 한국에는 수입되지도 않는 담배들을 종류별로 사들고 와서는 공강 시간에 늘 앉던 나무들 사이 벤치에 앉아서 피워댔다. 담배는 고등학교 시절에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어서 배연관처럼 뻐끔대려고 배운 거였는데, 대학교 2학년 때쯤 되니까 하루에 반 갑은 피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뭐든 꿈꾸는 것들을 할 수 있었을 그 빛나던 시절에, 누가 나에게 그렇게 젊음을 소모하지 말고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마음속을 들여다보라고 호통이라도 쳐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부모님의 커리어하이는 그즈음이었고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거의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했다. 바쁘실 거니까, 하면서 지레짐작으로 말이다.


내가 피우던 담배는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락밴드의 베이시스트가 피우던 거랑 같은 브랜드였다. 대학생활에서 삼삼오오 사람들은 자기의 그룹을 만들어가는데, 모두와 친하지만 그 누구와도 가깝지 않다고 느낀 나는 혼자 외롭다고 느껴질 때는 음악을 듣고, 그 밴드의 다큐멘터리나 인터뷰를 보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내가 절실히 원했던 것은 인정 욕구였던 것 같다. '다 잘하고 있으니까, 방황도 해 볼 수 있는 나이니까, 괜찮아'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센 탓에 이런 마음을 숨기려고 그렇게 부단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밴드의 공연을 보러 일본을 들락날락했다. 그 베이시스트가 공연장에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의 행복을 거기에 투영해서, 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 덕후 생활에 몰두했다. 그 생활 가운데 일본에서 만난 골수팬들은, 그 밴드가 전국/해외 투어를 돌 때 따라다니기 위해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지 않고 프리터 생활을 했다. 그들은 결혼이나 큰 야심 없이 어디든 그 밴드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おっかげ) 팬들을 자처했다. 나는 과연 그런 생활을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꽤 오래 일본 열도의 라이브 클럽들을 휘젓고 다녔다. 딱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밴드의 공연은 50회 넘게 봤던 것 같다. 나의 깊고 깊은 애정 어린 덕질은, 그 베이시스트가 은퇴하면서 일단 막을 내렸다. 그 사이에 연애와 직장 생활을 안 했던 것도 아닌데,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구멍이 하나 있었다.


그 구멍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려운 쪽으로 나 있었기에, 늘 공허함이 있었다. 나는 프링글스라는 과자를 결코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자취를 할 때 그 과자를 사서, 통을 베란다에 두고 담배 재떨이로 쓰고는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부터 찾았다. 밤에 자기 전까지 담배를 피웠다. 내가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혼자가 되어 보기도 했었고, 견디지 못하면 다시 공연장을 찾았다.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공항을 내려서도 쫓아와서, 그와 어쩌다 보니 잠시 장거리 연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자아가 없는' 내 마음을 채우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는 학교에서 심리학 강의들을 듣기 시작했다. 나에게 뭔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들여다보려고 했을 때는 대학에 입학하고서 어느새 3년이나 지나있었으니까. 그리고 강의가 계기가 되어 학생 심리학 연구소에서 장기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긴 여정의 시작이었지만, 그때라도 시작할 수 있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 나의 친했던 동기는 나에게 '너 자신을 잘 이겨내고 있다'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떤 사실은 자명하면서도 아주 시간이 오래 걸려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내 마음의 상처는 내가 나를 바로 보아주지 않아서 생긴 거였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제 때 하지 못해서 생긴 거였다. 많이 건강하고 활달한 성향이었기에 우울한 기분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것들을 했다. 일본으로 다닌 여행들이 나를 또 다른 곳으로 이끌었고,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했으며, 내 안의 포텐을 깨워준 것이나 다름없다.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하려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내던져보는 경험도 필요했던 것 같다. 꽤 길었던 우울함의 그늘을 벗어내자, 내가 살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보이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일을 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도 관두고 3년을 매진했지만, 결실을 맺을 수 있을 무렵에 또 한 차례 큰 좌절이 찾아오게 되었다. 방황 뒤에 찾은 목표를 또 잃어버리는 경험은, 뼈저리게 아프고 추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기억나지 않는 그 후의 3년을,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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