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한 사람의 뒤태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녀는 강했다.>
“그때 나 만났을 때 뭐가 괜찮아 보였어?”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면서 아내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날은 친구 결혼식의 축가 연습을 하고 온 날이었다.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점을 높이 샀다.
보통 남자들은 자동차에 여자를 태우면서 으스대고 싶어 하는데 나는 다르다고 했다.
살짝 튀어나온 도톰한 이마 아래로 검은색의 진한 눈썹과 크고 날렵한 눈매는 둥그스름한 큰 코에 멈칫하다가 보조개를 살포시 찍고 내려온다.
‘우유부단한 내가 그녀를 만나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휩쓸리듯 그녀와 후다닥 한살림을 차렸다.
후유증이 나타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처럼 회피와 우회를 반복하는 사람에게 그녀의 불화살은 정확히 나를 겨냥했다.
“오빠! 양말을 펴서 빨래통에 넣으라고 했잖아 초등학생도 이런 짓은 안 한다니까"
30년 남짓 금성 여자와 화성 남자는 밥상에 수저와 젓가락을 놓는 법부터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방식까지 다름을 몸으로 겪었다.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갈 즈음 양가 부모님이 들이닥치는가
하면 되돌 릴 수 없는 길을 건너갈 뻔하기도 했다.
<문화 충돌>
그때부터였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그녀였을까?”
사실 내게 온 것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처가 식구들이라는 거대한 또 다른 세계가 같이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낯선 사람들이 대거 들이닥쳤다.
사람과 시간 그리고 환경의 변화는 우리들의 풍경도 바꿨다.
아이 셋을 거느린 육아의 중심에 장모님이 계셨다. 6명의 또 다른 가족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막내에서부터 중학교 2학년인 큰놈까지 장모님의 손길이 가지 않은 시기가 없었다.
아내와 내가 출근하는 날에는 빨래와 식사, 아이를 돌보는 일이 모두 장모님의 몫이었다.
따뜻한 밥을 먹고 출근해야 일을 제대로 한다며 아침을 차려주시는가 하면 김치와 된장 등의 밑반찬도 종종 보내주셨다. 농담으로 장모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부부는 이혼했을 거라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
삶의 배경도 달랐다.
대식구를 거느린 처가는 명절이나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발 디딜 틈이 없다. 아내는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다. 형님 내외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고 처형 내외와 우리 부부가 아들만 각각 세 명씩이다.
대식구가 뭉치는 날이면 내 정신은 이미 안드로메다에 가 있다.
TV를 틀어놓고 한쪽에서는 여자들의 수다가 한창이고, 그 옆에서는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고
한쪽 방에서는 이제 콧수염이 나기 시작한 시커먼 놈들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아내에게도 시댁은 생소함이었을 게다. 아버지는 첫 며느리의 안부 전화를 종종 받는 것을 좋아하셨다.
간호사인 아내는 환자가 몰리는 날이나 아이들에게 손이 많이 가는 날일때면 종종 구겨져 있었다.
여유가 없어 안부를 묻는 시기를 놓치는 날에는 아버지의 눈치가 느껴졌다고 했다.
거미줄에 얽히고설키듯 우리는 새로운 가족사를 써나갔다.
결혼생활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였다. 장남으로써 부족한 존재감을 온전한 가족의 모습으로 대체하려 했다.
그게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보여주기 보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해하고 이해 받기를 원했다.
그게 삶의 순리라는 것을 또 다른 가족을 체험하면서 깨달아 갔다.
다툼이 생길 때마다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아내의 말에 난 자주 궁색해졌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와 내 주변의 삶을 돌이켜봤다.
‘내가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것인가?’
‘부모님이 날 잘못 가르치신거야?’
그러면서도 잠시 자존감을 주머니에 넣고 아내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내가 그런 면이 있단 말이지? 왜 늘 가던 길만을 고집하는 거지?’
마치 거울로 못 보던 곳을 보여주는 듯 했다.
우리는 공동 운명체였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먼지는 모두가 다 같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늘 창문을 닫아둘수도 먼지가 늘 불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측은 지심>
다른 결과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은 더디고도 지난했다.
나의 세계와 그녀의 세계는 분명 달랐다.
까발려서 해부하고 분석하고 햇빛에 쏘이고 나서야 모든 게 조금 더 분명해졌다.
어쩌면 무탈한 내 인생에 고된 적응 시간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종교가 있었다면 신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어떻게 난 지금의 모습이 되었냐고
아내는 독감 환자와 코로나 환자 등으로 병원에 사람이 몰리면서 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눈 밑에 판다처럼 다크서클이 생겼다. 집에 오자마자 퍼지는 날이 많아졌다.
병원에서 혹사당한 정강이를 주물러 달라고도 했다.
한창 막내를 키우던 시절 아내는 젖몸살에 허덕였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냉장고에 모유를 받아 놓기도 했다.
모유를 주체할 수 없는 날에는 병원 근무복이 금세 젖기 일쑤였다.
내가 아니 남자들은 잘 모르는 그녀들만의 고충이 있다는 걸 새삼스레 되 짚어본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부터 달리 보였다. 으르렁대던 아내가 측은해 보이기 시작한 거다.
“너희도 늙어봐라 너희 둘밖에 없어 서로 불쌍한 줄 알아야지”
종종 우리 부부를 만나면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서 한 곳만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관심이었다.
조금 더 알게 되니 흠모와 애착이 생겼다. 그러다 실체를 알게되었다. 미움과 분노가 일었다.
처음으로 되돌리고도 싶었다. 늘 정면만 바라보다가 우연히 측면에서 바라 본 그 모습이
꽤 멋지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사람의 뒷 모습을 봤다. 그 짠한 뒤태를...
한때 화가 나서 자신을 태우러 오지 말라는 아내의 말에 정말 병원에도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아내의 독설에도 감춰진 속내가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게 온다는 것은>
이제는 조금씩 알 거 같다. 정영종 시인의 ‘방문객’의 시구처럼 그녀가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오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안다.
이제는 부서지기도 했을 그 마음까지도 말이다.
우리가 겪어내는 일상은 영화 속 ’신세계‘처럼 화려하지도 우아하지도 않았다.
나만의 세계를 고집하되 경계선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물들인다. 그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는다면 금상첨화다.
때로는 정면으로 어떤 날은 우회하듯이 서로를 지켜본다. 하지만 구속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되 그럼에도 애정을 놓지 않는다.
이상에 젖어 머리를 싸매고 허공을 헤맬지라도 현실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잡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안정감을 준다.
<촌놈 촌년을 만나다.>
“그때 나 만났을 때 어땠어?” 그녀가 질문을 시작했다.
“음... 봐줄만 했어”
내게 봐줄 만한 거와 먹을만하다는 것은 큰 칭찬이다.
여전히 도톰한 이마와 조금은 누그러진 눈매와 변치 않는 큰 코, 옅어지지 않는 보조개까지....
‘전남 곡성군 오지리’라는 촌구석 중의 촌구석에서 온 ‘촌년’은 그렇게 남원 ‘촌놈’을 만났다.
내 안에 없는 것은 날 자극 하지 못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같은 종자의 사람을 알아본다.
꾸미지 않고 과하지 않으며 억지 부리지 않는 순수함, 어찌 보면 투박하고 거칠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투명해서 그 안이 들여다 보이는 여자, 무슨 일을 하는지 예측이 되는 남자
경계가 없이 교묘한 조합은 부족한 부분을 맞춰 촌사람 특유의 합을 이룬다.
지난한 시간 속에서 둘은 서로의 거울이 되어준다.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보고 나에게서 그녀를 발견한다.
그렇게 ‘남‘이었던 둘은 받침을 덜어내고 ’님‘으로 다가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