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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사람 Jul 31. 2016

소멸을 향한 두려움

미술과 문학에서 죽음의 조각으로 묘사되는 그림자



등불이 놓인 방. 남자가 불빛을 등지고 앉는다. 이윽고 방으로 들어오는 여자. 그녀는 곧장 벽으로 가 등불에 비친 남자의 그림자를 따라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대상에서 비롯된다. 그 대상의 내부에서 파생되어 존재의 바깥으로 스스로를 내뻗는다. “존재가 있기에 재현이 가능하다”는 인과 관계로 시작된 선은 남자가 방을 나가면서 그림자를 잃고, 그의 형태만 남았다. 여자는 벽에 그려진 ‘그를 닮은 선’을 어루만진다.


살아있지 않은 것들도 ‘존재’라는 상태로 어딘가에 놓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테이블 위의 사과가 사라지는 건 손쉽게 일어난다는 점에서 사물의 사라짐은 익숙하다. 그러나 살아있는 모든 것의 사라짐은 ‘죽음’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존재를 해체시킨다. 해체된 존재는 더 이상 그림자를 가질 수도 없다.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그림자는 살아있는 것들을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조각일지도 모른다. 그림자는 존재 안에 머무르거나 딱딱한 벽 따위 아무 소용없다는 듯 휘어지거나 하면서 존재의 해체를 암시한다.


다시, 남자의 그림자만 남은 방이다. 여자는 남자를 그리워하며 벽에 그려진 선을 만지다 갑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찾는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발밑에 늘어진 그림자를 찾고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림자를 따라 선을 그린다. 여자의 행동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정지시키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됐다. 여자는 연필을 놓고 급하게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두드렸다. 곰곰이 따져보니 그림자는 내부와 외부를 가리지 않는 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림자는 죽음을 망각하는 인간에게 드리워지는 일종의 명암이기도 하다.

우리는 머릿속에 그려본다는 표현을 종종 한다. 그립거나 꿈꾸는 것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일. 그림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붙잡으려는 욕망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사라짐의 두려움은 사람에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캔버스 위의 정지 화면은 화가의 삶에 영향을 준 선입견과 경험들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존재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는 성질 때문에 기록이 발전되어 글이 되고 그림이 된다면 그림자는 분명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그림과 글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많다. 여기, 그림자를 이용해 이야기를 던지는 많은 시 중에서,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하디의 시를 하나 소개한다.



돌 위의 그림자


나는 드루이드의 돌을 지나갔다.

희고 외진 정원 안에 있는 돌이었다.

나는 멈추어 서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때대로 돌 위에 떨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나무에서 뻗어 나와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그 그림자는

내 상상 속에서

어느 유명한 여인이 정원을 가꾸고 있을 때

그녀가 던지는 그림자의 모습으로 화하고 있었다.

등 뒤에 그녀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갈망하는 그녀는 사람 눈에서 모습을 감추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나는 말했다. “당신이 내 뒤에 있는 것을 알고 있소.

그렇지만 이렇게 낡은 오솔길에 어떻게 들어왔나요?”

그러나 하나의 슬픈 응답으로 잎사귀가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등 뒤에 아무도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한 번 더 생각했다. “아니야. 나는 환상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그 형상은 어쨌든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나는 빈터를 조심스레 나왔고

내 등 뒤에서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그녀를 떠났다.

그녀가 진실로 환영이었기에?

내 꿈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디의 시 속에서 그림자는 인간의 망각 속으로 쉽사리 사라지는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것처럼 시간을 보내지만 사실 죽음은 언제나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의표를 찌르며 나타난다. 시에서 표현되듯 ‘낡은 오솔길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를 모습으로 불숙 찾아오게 죽음이다. 죽음이 언제나 ‘내 뒤에 있는’ 것을 알지만 시인은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저 ‘잎사귀가 떨어지는 소리’에 집중하며 죽음을 외면하고자 한다. 마지막 연에서 표현하듯 ‘내 꿈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시인은 죽음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림자는 우리 삶 속에 계속해서 던져진다. 우리를 뒤따르면서 망각하는 죽음을 기억하라고 한다. 어쩌면 죽음에 맞서려는 저항이 여러 기록에서 그림자에 대한 의구심으로 표현되어 시대를 반복하며 등장하는지 모르겠다. 죽음에 대한 ‘형상은 어쨌든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하디의 시 속에 나오는 것처럼 죽음은 ‘사람 눈에서 모습을 감추는 법을 배’워서인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도처에 있다. ‘희고 외진 정원 안에 있는 돌’에 드리운 그림자처럼 평범한 일상에 바짝 붙어있다.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한 가지 중 하나는 죽음이다. 사라짐을 인식하며 사는 이들은 살아가는 일의 중요성도 안다. 사는 일에 열심을 내는 이들이 더불어 사라짐의 일도 심도 있게 다루면서 삶을 소중히 한다.


그림자는 자신을 드러내면서 사라짐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라며 우리의 발밑을 맴돈다. 이 주제와 관련해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도 하나 소개한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라팔 올빈스키(Rafal olbinski)다. 그는 폴란드 키엘체 출신의 화가로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작가’로 불린다. 나는 그의 그림을 처음 보고, 한 폭에 담긴 많은 해석의 여지에 흥미로웠다. 그의 그림 중 「Innocence」를 소개한다. 


Rafal Olbinski, 「Innocence」  ⓒ http://www.tendreams.org/



생각하고 있는 어떤 깊은 주제가 있다면 그와 관련한 그림들을 찾아보길 추천한다. 이미지는 강력한 이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그려본 개념과 닮은 이미지를 찾으며 생각은 더욱 명료해질 것이고 자연스레 많은 화가의 그림을 접하게 될 것이다.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이 미술과 가까워지는 재미있는 놀이가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건 내가 글을 쓸 때 가장 많은 도움을 받는 방법이기도 하다.


죽음과 그림자, 사라짐과 드러남의 경계에 관한 생각할 거리는 내가 위에 쓴 많은 글보다 라팔 올빈스키의 「Innocence」와 토마스 하디의 시, 「돌 위의 그림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지도 모르겠다. 그게 미술과 문학이 지닌 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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