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사람 Nov 12. 2017

아직 맛보지 못한 맛

오지 않은 놀라움들을 기다리기

 

 막 이십 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깜짝 놀란 두 가지의 맛이 있다. 하나는 신촌의 한 우동집에서 알바를 할 때였다. 바로 옆에는 크리스피크림 도넛 1호점이 공사 중이었다. 현지 본사에서 온 외국인 직원들이 우동을 먹으러 이따금씩 오곤 했었다. 올 때마다 나누는 인사가 반가워지더니, 그들은 곧 오픈을 한다며 오리지널 글레이즈를 맛보라고 갖다 주었다. 반듯한 종이 박스 안에 담긴 도넛들은 표면이 코팅된 것처럼 반짝였다. 크리스피크림이 정식 오픈하기 전 처음 맛본 글레이즈는 황홀했다. 솜사탕처럼 금세 사르르, 없어지는 통에 애가 타서 그랬나. 그 첫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도넛을 맛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피크림이 오픈했다. 


 가게에서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도넛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 왠지 모를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소설의 다음 페이지를 다른 이들보다 뒤늦게 넘긴 것 같아서 그랬다. 나는 소위 촌스러운 사람이라서 그렇다. 어릴 때는 더욱, 융통성도 재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너무 몰랐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늘 늦는 사람인 건가 싶었다. 초대받지 못한 곳에 들어선 것처럼 낯설고 쓸쓸한 기분이었다.  


 우동집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나오면 크리스피크림 앞에 사람들이 줄 지어 서 있곤 했다. 유리창에 붙은 간판에 불이 들어오면 막 완성된 글레이즈가 매장에 나왔다는 신호였다. 그때는 간판에 불이 켜지면 글레이즈를 무료로 하나씩 나누어 주었었다. 어느 날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줄 지어 선 이들과 컨베이어벨트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도넛을 보며 만드는 이들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도 모두가 열심히 사는 구나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나 또한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던 시절이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나란히 늘어선 도넛처럼 나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몫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자책이 들었던 때였다. 나이에 걸 맞는 순서를 밟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급함이 늘 뒤따랐지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좌절하지 않는 것이 그 당시 나의 목표였다. 


 나는 크리스피크림이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동집에서 의류 브랜드로 일자리를 옮겼다. 신촌에서 명동으로 일터를 옮겼는데 그때 끼니마다 먹었던 명동의 먹거리 중에서 잊지 못하는 것이 바로, 취천루의 물만두다. 명동 영플라자 맞은편 초입에 있었던 취천루는 상사가 데려가 준 곳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일을 하며 아직은 쭈뼛쭈뼛 눈치 보던 나는 상사가 시키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물만두를 먹겠다고 했다. 처음엔 점심시간에 찾아간 곳이 만두집이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두로 점심을 때운다니. 게다가 가격표를 보고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두 한 접시에 기본 7,000원이 넘는 것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한 접시였다. 하지만 우려는 물만두를 먹으면서 사라졌다. 물만두는 보드라운 식감에 따스함을 머금고 있었다. 고기의 쫄깃한 식감과 만두에서 베어 나오는 육수가 경직된 마음을 무장해제시켰다. 나는 이후로 혼자서 만두집을 찾아가 이해할 수 없는 한 접시를 시켜 먹었다. 


 일했던 의류매장은 한국에 상륙한지 얼마 안 됐지만 인기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매장 정리를 하다 보면 금세 어두워지곤 했다. 나는 운영 시간이 끝난 고요한 매장을 좋아했다. 막 내린 공연의 객석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직원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추천해주었다. 소설을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건네준 대답이었다. 자주 가던 헌책방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걸작선’을 사서 먼저 읽은 후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숲에 내려앉은 짙은 어둠처럼 쓸쓸함이 담긴 문장에 금세 매혹되었다. 나는 또 뒤늦게 서야 앞서간 발자국을 찾은 길 잃은 사람처럼 당황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방식으로 사랑이 찾아올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문장을 썼을지 가늠도 해보고, 글쓰기에 몰두하는 그의 곁에서 앉아 있는 상상도 했었다. ‘해변의 카프카’를 읽은 직후에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멍울진 고민의 지점을 찾은 것 같았다. 헝클어진 옷들을 정리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크리스피크림 도넛 1호점이 문을 닫았고, 명동에 있던 취천루도 없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생겨난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은 바람과 달리, 속절없이 사라져서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내게는 방향을 고민하던 지점에 크리스피 크림 도넛과 취천루의 만두, 그리고 하루키의 소설이 있었다. 내 주변을 안개처럼 장악했던 하루키의 문장과 한때만 주어지는 젊음의 축복이 변화에 속도를 붙였다. 나는 매장을 그만두고 대학교에서 들어가 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다. 


 이후로도 각별한 친구의 소식을 받아드는 기쁨으로 하루키의 신작들을 읽었다. 처음 읽었던 하루키의 ‘단편 걸작선’ 속 단편 소설, ‘택시를 탄 남자’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의 인생은 이미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그것은 한 부분이 끝났을 따름이며, 이제부터 무언가를 거기에서 얻을 수가 있을 거라고요.  

 

 불현듯 찾아오는 터닝 포인트가 있다. 그건 우리가 인생의 기로에 다다랐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선택하고 새롭게 노력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진다는 건 아직 삶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기로를 즐겁게 받아들이면 된다. 이제는 좀 더 여유롭게 기로에 서서 멀리 바라보고 움직일 요량이다. 나를 놀라게 했던 크리스피크림 도넛과 취천루의 물만두처럼, 아직 맛보지 못한 놀라운 맛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더 많다고 믿어본다.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정호승, '부치지 않은 편지'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 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