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영화를 살린 인물들의 대립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 시절 ‘둠(Doom)’이라는 게임이 있었다. 무슨 이유로 화성으로 떨어진 해병이 어쩌다 보니 괴물들을 죽이는 게임이다. 살아남기 위해 악마를 죽이는지 살아남으려는 악마를 주인공이 죽이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그 게임을 즐긴 사람들 대부분 스토리를 잘 모른 채 플레이했을 것이다. 하긴 악마를 죽이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얘들이 악당이라니까 그저 열심히 괴물들을 찢고 죽이다가 엔딩을 보면 됐다.
요즘 '둠'과 같은 게임이 나온다면 옛날 처럼 인기를 끌 수 있을까. 동기부여를 위해 아무리 흉측하고 힘이 센 괴생명체가 나와도 잠깐 흥미는 끌어도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살면서 느낀 바에 의하면 악은 그 자체로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숨어있다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어디선가 조금씩 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악을 없애는 것보다 ‘무엇이 그것을 키우는가?’라는 주제에 더 관심이 많다. 요즘엔 악당의 사연도 많이 중요해졌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 ‘킹스맨’의 밸런타인 박사,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월터. 이들의 매력은 그들이 가진 철학 그리고 그 행동에 이르게 한 그들만의 사연에 있다. 더 치명적인 것은 그 뒷 배경에 납득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주인공의 대립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사연이 있으면 더 김이 새는 악당도 있다. 바로 사이코패스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사고와 행동 패턴에서 공포감을 줬다. 그들을 설명하는 것은 구구절절한 사연보다 엄청난 이력의 연쇄살인이 효과적이다. 어떤 뉘우침도 인간적인 공감도 매력도 없는 미치광이. 이것은 밑도 끝도 없는 악마와 궤를 같이 한다. 실재하기 때문에 여전히 두려움을 주지만 이런 캐릭터는 한계가 너무 분명하다. 우리가 묻지마 괴물 살인 게임에 흥미를 잃어버리듯, 이런 차가운 인간같지 않은 살인마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재난영화에 가깝지 않을까.
갑자기 사이코패스 얘기를 한 이유는 영화 ‘브이아이피’에도 그런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자만 골라서 끔찍한 짓을 하는 악질이다. 곱상한 얼굴로 뭇 여성을 사로잡았을 미소를 지으면서…. ‘얘는 엄청 나쁘고 천하에 못돼 빠진 놈’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감독의 노력이 느껴졌다. 그런 캐릭터의 한계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본다. 사이코패스가 인간적이면 사이코패스가 아니지 않은가. 어떤 것에 대한 강한 집착 그걸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분노만이 있을뿐이다. 차별성을 나타낼 열린길은 더 흉악한 범죄밖에 없어 보인다. CIA와 국정원 그리고 북한의 고위 공직자들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캐릭터를 위해선 이런 미치광이 살인마 설정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더 색다른 악이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래서 내가 원했던 악당의 사연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악당을 둘러싼 인물들의 사연이 있었다. 만약 영화가 미치광이 살인마 김광일과 그를 저지하려는 세력의 대립으로 그려졌다면 정말 시시하고 뻔한 B급 보다도 못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를 둘러싼 알력이 주된 내용이다. 일단 줄거리를 대충 정리해보자.
북한의 권력 제 이인자 장성택의 중국 금고지기 김모술 그리고 그의 아들 김광일. 북경의 금고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다 역적모의로 장성택 라인은 오리알 신세가 되고 김광일은 탈북한다. 그 정보를 입수한 CIA는 북경에 있을 돈을 추적해서 빼내려고 김광일을 이용하려 한다. 돈이 탐났다기보다는 돈줄을 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김광일은 쉽게 그 정보를 불지 않고 그 계획을 악용하여 신변보호를 요청한다. 미국은 사람을 밥먹듯이 죽이는 미친 사람이니 만큼 한국에 묶어두고 거래할 생각이다. 그렇게 CIA와 국정원은 그 살인마를 한국에 들인다.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경찰은 채이도를 통해 연쇄살인 해결을 지시하고 김광일을 체포하기 이른다. 박재혁은 기획 귀순 사실을 덮기 위해 김광일을 미국으로 빼돌리려 한다. 그 와중에 북한 경찰 리대범은 그를 북한으로 끌고 가서 심판하려 한다...
‘V.I.P.’는 김광일이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그를 두고 벌어지는 각 세력 간의 다툼을 비췄다. 그들은 김광일을 처치해야 할 악으로 보기 전에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먼저 바라봤다. 오히려 힘을 엉뚱하게 서로 대립하는데 낭비한다. 각자 이익이 일을 지체시키고 더 꼬이게 만든 것이다. 정작 제일 중요한 자신을 앞에 두고 서로 열 올리고 우왕좌왕하는 그들을 보고 김광일은 얼마나 비웃었을까.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과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호해야 하는 국정원,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살인마와 협상을 하는 CIA. 그들의 알력은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났다. 채이도는 반죽음 상태에 빠지고 박재혁은 자기의 잘못된 판단으로 애꿎은 피해자만 생기게 했고, 폴은 원하는 정보도 얻지 못했다. 리대범도 또한 김정일이 죽고 장성택이 다시 복권하면서 배에서 김광일에게 죽임을 당한다. 끝에 박재혁은 장성택이 처형당한 뒤 다시 탈북해 홍콩에 숨어 지내는 김광일을 찾아가서 죽이지만, 어째 그 죽임은 속 시원하기보다 씁쓸하고 무상하다.
‘브이아이피’는 기획 귀순이라는 특이한 소재로 흥미로웠다. 반사회적 성격 장애를 가진 살인마는 뻔한 소재일 수 있다. 아니 진부했다. 그나마 북한 고위 공직자 자제라는 점이 그것을 보완했다. 하지만 초점이 그를 두고 벌어지는 인물들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가면서 사회의 악과 그를 다루는 인간의 모습을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었다. 시스템에 의해서 국제 정세에 의해서 어쩌지 못하는 모습은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도 떠올랐다.
박훈정 감독은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 ‘신세계’의 각본을 썼었다. 그만의 거칠고 강렬한 인물들의 대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맘에들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