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카프카식 질문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포막의 발달은 세포 복제를 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단순히 보호하는 막이 아니라, 세포와 ‘세포가 아닌 것’ 사이에 경계를 짓고 무엇을 복제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행동인 번식을 위해서도 나와 타자의 구분은 필수적이다.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는 것은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세포처럼 물리적인 것에만 한정짓지 않는다. 생각하는 방식, 가치관, 호불호와 같은 내적인 요소에서도 ‘자신’과 ’나다움’을 찾는다. 영혼은 믿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마음 또는 정신이 우리 자신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성형수술을 통해 외모가 아무리 바뀌어도 나는 전과 같은 나일 수 있다. 마치 신체라는 껍데기에 정신이 깃든 것처럼. 그때, 카프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벌레로 변해 허우적거리는 그레고르를 가리켰다.
충격에 빠진 가족의 태도는 여전히 아들이자 오빠라는 그의 정체성을 조금씩 해체했다. 타인의 인정이 없는 ‘나’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그나마 먹을 것을 챙겨주고 방을 청소해주는 여동생이 있었지만, 나중의 내용을 보면 그것도 언젠가는 본모습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게다가 변해버린 그의 식습관과 더듬이를 사용하고 기어다니는 것 등, 신체적 조건에서 오는 제한들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 될 수록 그는 영락없는 벌레가 되어갔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만이 그가 ‘그레고르 잠자’였다는 사실을 흐릿하게 알려줄 뿐이었다.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을 버려야해요. 참으로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불행이에요.
여동생의 말처럼 그건 그저 ‘믿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동생마저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그 또한 자신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을 버리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정신은 계속 존재하면서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했더라도, 그는 인간 그레고르가 아니라 벌레였다. 몸이 변해버린 그날 이미 ‘그레고르’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똑같은 행동도 어떤 몸을 통해서 드러나느냐에 따라 상대방에게 다르게 전달되고 상대방은 나를 다르게 인식하고 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똑같은 과정이 반대로 나에게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주고받는 자극과 크고 작은 영향 속에서 내가 가지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개념 그리고 타인이 가지는 반대의 생각이 만들어진다. 어쩌면 ‘나 자신’은 내 것이면서도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다르다.
나의 몸을 벗어나서 상황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고정된 ‘나 자신’은 없다. 나는 나에게 부여된 조건에서 거기에 맞추고 조정해가면서 타인들과 구별되는 일종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늘 주변을 보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나는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