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혁민 Jan 23. 2019

[솔직한 연애 이야기] 쉽지 않다

살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치열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어른스러운 여자 친구. 내 모든 것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존재. 편하고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알아서 되는 연애. 뭐 하나 쉬운 게 없는 이 세상에서 감히 사랑이 수월하길 바랐다.


나는 안정적이고 성숙한 연애를 꿈꿨고, 지원이는 나에게 어린이가 되고 싶어 했다. 둘이 바라는 사랑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어째 그 과정은 경쟁보다 치열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는데 감정이 방해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평정을 우선으로 여기고,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전까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반면,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어도 남아있는 감정 때문에 떼를 쓰고, 작은 일에도 하루를 뒤엎고, 만나면 그동안의 모든 일들을 기승전결도 없이 내게 보고하는 사람이 지원이다.


혼자 속으로 정리하고 마는 것이 몸에 베인 내게, 일곱 살짜리 아이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고 알리는 지원이의 방식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지원이는 모든 감정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나와 나누려고 했다. 어떤 감정을 겪으면,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고, 원인을 추적하고, 내가 묻지 않아도 설명했다. 그러면 과거 얘기도 나오기 마련이다. 스스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혀서, 그 주제로 데이트를 채운 적도 있다. 남자 친구로서 여자 친구의 과거 얘기를 듣는 것은 썩 유쾌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원이는 누군가에게 그 열의를 쏟아내지 않으면 진심으로 견디기 힘들어했고, 나도 그 모습을 보기는 싫었다.


몰입을 할 수밖에 없는 여자 친구의 얘기를 듣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감정의 기복을 함께 하다 보면 심적으로 지친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 날이 선 대답이 나갈 때가 있다. 말이 길어지면, 왜 이렇게 듣고 있어야 하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참 신기한 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쌓였던 인내심도 지원이의 속이 후련한 듯하면서도 멋쩍은 미소와 ‘들어줘서 고마워’, 이 한 마디면,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일말의 체면도 없이, 날 것 그대로 온전히 전달된 지원이의 말들은 내 가치관과 감정을 통과하면서 온갖 마찰을 일으켰다. 때로는 크게 한 방 먹이고, 때로는 날카롭게 할퀴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속에 때가 묻지 않은 지원이의 깨끗한 솔직함을 볼 수 있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진심으로 보인 순간 미워할 수 없었다. 그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랑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데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언제나 기쁜 순간만 있을 수 없다. 좋은 순간들은 함께하는데 큰 힘이 들지 않지만, 상대의 분노와 고통과 슬픔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노력보다 뭔가를 진실되고 가치 있게 만드는 건 없다. 하물며 그 대상이 사랑이라는데.


진정한 힘은 갈 때까지 갔을 때 드러나는 법이다. 순간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참는 것은 늘 있어온 일이고 이건 타고난 나의 미덕이다. 그러나 지원이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지를 그토록 고민할 수 있었던 건 사랑의 힘이었다.



p.s.

“제발 좀 어른처럼 생각할 수 없나?”라고 쏘아붙이지 않은 것은, 내가 지원이를 만나고 가장 잘한 것 중 하나다.

작가의 이전글 질문 없는 수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