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향은 싫어하는 것들의 여집합
'너가 좋아하는 건 대체 뭐야? 왜 이렇게 항상 심드렁해해'
날 오랫동안 알아온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지나가듯 말했다. 내 친구는 자신의 취향을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방탄소년단에서는 '정국'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고, 그의 직캠을 보여주며 자신의 입덕 계기가 정국의 튼튼한 허벅지라며 영상을 확대하여 보여주곤 했다. 또, 프랑스 교환학생 시절 북창동 순두부 가게에서 알바하며 마셨던 만원 짜리 소주의 맛을 오래도록 찬미하였다. 그럼 나는 옆에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지는 '정말 좋았겠네'라고 말하며 그녀의 소주잔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었다.
사실 난 기본적으로 '호'보다 '불호'가 강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것을 말하기 보다는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게 편하다. 좋아하는 대상을 표현할 땐 싫어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 좋아한다고 말한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 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게 비슷하고 두루뭉술하고 비슷한 강도를 가졌지만,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아주 분명한 이유를 가지며 그 강도가 제각각이고 또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이상형을 말할 때는 마초적인 성격과 자의식 과잉인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말했고, 좋아하는 음식을 말할 때에는 '오이'빼고는 다 먹는다고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감상을 숨 가쁘게 늘어 놓기 보다는 싫었던 영화의 감상을 정리하고 다시는 유사한 영화를 찾아 보지 않도록 감독의 이름을 외웠다. 심지어 '국민 프로듀서'를 제 2의 직업으로 삼았었던 프로듀스 101 2 애청자 시절, 나는 '최애'는 없고 '떨어져서는 안되는' 아픈 손가락만 망태기에 가득 담고 있어 주변 친구들의 놀림을 받기도 했다. 결국 매 투표마다 하위권에 놓인 연습생들을 뽑아주느라 정작 그나마(?) 가장 좋아했던 연습생이 탈락위기에 놓일뻔한 적도 있었다.
이렇듯 내 취향은 내가 싫어하는 것들의 여집합이다. 나의 가계부는 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소비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내 한 몸 뉘일 곳을 위해 지불하는 전세 이자값, 아사하지 않기 위해 구매하는 쿠팡 프레시 식료품, 얼어죽지 않기 위해 샀던 롱패딩 값... 등. 물론 그 소비에서도 내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서비스와 디자인을 선택하곤 했지만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나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소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인센티브가 들어오는 2월 평소에 사고 싶었던 사치성 소비들, 예를 들어 애플 워치, 아이앱 후드 등을 사곤 했지만 이는 1년 목표 저축액을 달성하기 위해 지출을 통제할 나에게 주는 선불제 '당근'에 가깝다. 이런 나에게 나의 소비를 영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다 싫어하는 것 빼곤 다 좋아하는 슴슴한 계란국 같은 어른으로 커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내가 싫지는 않다. 싫어하는 것들이 명확하다 보니 싫어하지 않은 것들은 대개 모두 긍정할 수 있다. 누군가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하는 두리안, 정돈되지 않고 흐트러진 무질서한 공간, 만인의 빌런 상사A도 '그럴 수 있지~', '나쁘지 않아' 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나의 가장 좋은 점은 싫어하는 것들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는 점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의식과잉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책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시대에 도태되는 구식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신청한 데이터 분석 수업에 과제를 작성한다. 전체에서 최악들의 교집합을 뺀 인간의 모습은 어찌보면 꽤 근사한 인간이 아닌가?
조물주가 하늘에서 나와 내 친구들을 각종 공예 재료들로 만드는 모습을 상상한다. 내 친구와 나를 만드는 방법은 완전 정 반대일 것이다. 내 친구는 방탄소년단 정국과 프랑스의 소주라는 지점토로 살을 붙여 만든 말랑한 인형일테고, 나는 정사각형 대리석을 송곳으로 내리 꽂아 오이, 자의식과잉이라는 돌을 깎아내어 만든 돌조각일 것이다. 오늘도 터무니 없는 상상을 하며 그녀의 방탄소년단 이야기에 웃으며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