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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미지 Oct 15. 2023

[SF 단편소설] 키다리아저씨

미래의 어떤 만남에 대한 이야기

"...이렇게 일부 고착화되어 있는 동부전선을 돌파하여 북동쪽으로 펼쳐지는 2차 전선을 형성하려고  목표하고 있으며, 각하께서 주문하신대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진격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잠깐.”


회의장 가운데 앉은 트레스턴 녹스 총리의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장군의 브리핑을 멈추게 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지옥의 불바다를 비추는 등대와 같은 눈빛으로 시뮬레이터의 검고 넓은 수평화면 위를 말없이 바라보다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오류가 아니고서야 동부전선의 전차 수가 겨우 저것 밖에 안될리가 없을텐데? 동쪽의 기갑 규모가 왜 이렇게 줄어든거지? "

"아…” 브리핑을 하던 장군이 주저하며 말했다. ”실은 지난 달 프로살리아와의 동부 전투에서 아군이 패배해 동부 기갑 전력의 1/3 가량을 잃었습니다."


전술 회의실의 장군들은 그 순간 모두 숨을 죽였다. 거대한 납덩어리같은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워 시뮬레이션 속, 제 자리 걸음하는 입체 전차 모델들의 궤도 굴러가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총리의 주름진 얼굴을 스친 당혹스런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방금의 이야기는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패전이었음이 분명해보였다. 측근 중 누군가가 또 다시 의도적으로 보고를 누락했으리라.


총리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의 옆머리를 한참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회의실에 건조한 탁탁 소리가 울렸다. 장군들은 자신들을 빙 둘러싼 총리의 친위대가 어느 순간 그들에게 다가와 당장이라도 책임을 물으며 자신들을 끌고 가진 않을지, 혹은 황금으로 도금된 소총들을 머리에 겨누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온 신경을 총리의 입 모양에 집중하였다. 예상과 달리 총리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한심하기 짝이없군. 이 한 줌으로 무슨 진격과 대규모 전투를 하겠다는 거야? 일단 진격의 속도를 조절하고 북부의 기갑 일부를 동원해서 전력을 당장 보충하게. 동부전선에 드론부대 공중 지원은 불가능한가?"


그게 끝이야? 대리석 바닥만 바라보던 젊은 장군들 몇몇의 눈이 재빨리 시뮬레이터 위로 움직여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총리가 평소와 다른 덤덤한 표정으로 공군 측 장군을 바라보자, 장군은 오히려 더 당황하여 총리의 눈을 피하면서 거의 혼잣말하듯 웅얼웅얼 대답했다.


"지난달 공습으로 파괴된 동부 공군 기지들의 수리가 아직 덜 끝났습니다. 남부에 있는 드론들을 이륙시켜야하는데 연료 보,보급 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동부전선까지 지원하기는 아직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보인다.지 안된다.는 아니로군. 연료문제는 중앙에서 추가 보급을 받으면 해결가능해. 내가 연락해 놓을테니 공중지원도 즉시 준비하게."


이번엔 더 많은 장군들이 고개를 들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이토록 신사적인 말투라니. 천하의 녹스 총리도 짙어지는 패전의 그림자에 싸여 이젠 고성을 지를 의욕마저 잃어버린 걸까? 아니야, 어쩌면 이건 목숨을 걸어야하는 교묘한 자격시험인지도 모른다. 당혹스러워 하는 속삭임들 가운데 총리가 가볍게 한 마디를 보탰다.


"작전은 그대로 진행하게. 다만 동부의 진격 경로는 바꿔야겠어.“ 총리가 손짓하자 늙고 마른 사냥개를 닮은 보좌관이 시뮬레이터에 다가갔다.

“그 옛날 위대한  한니발 장군님의 전략처럼, 약삭 빠른 프로살리아 놈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길을 이용해 사각을 파고 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네."


총리의 눈짓에 보좌관은 시뮬레이터에 새 데이터 값을 전송하였다. 이내 새로운 경로가 입체지도 위에 붉은 선으로 떠오르자, 장군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웅성거렸다. 고민하다 한 장군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각하, 외람되지만 이 경로로 진격할 경우 교전 시 해당지역의 전투는 십중팔구 장기 소모전으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맞습니다, 저희 군에겐 너무 큰 도박입니다." 여기 저기서 그 의견에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하자자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총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군의 옆으로 천천히 걸어간 뒤 그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그러자 웅성거림은 일순에 멈추었다. 총리가 나직이 말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실수를 한 것 같군." 장군의 어깨가 긴장으로 뻣뻣해진 것을 손으로 느끼며 총리는 미소를 반쯤 거둔 얼굴로 반대편 장군들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을 오해하게 했어, 내가. 방금의 이야기는 제안이 아닌 명령이었는데 말이야. 내가 방금 여러분들의 의견을 물어 봤던가?"


"...! 아! 아닙니다!" 장군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선가 친위대의 소총 노리쇠가 철컥 거리는 환청이 들린 듯하여 몇몇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지 않으려고 시뮬레이터 받침대의 마호가니 장식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내 충고 하나 해주지.” 총리는 장군들 하나하나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메시지의 옳고 그름이 아니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지위이지. 앞으로는 그 점을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말하도록.” 장군들 모두는 공포에 질린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이며 거짓 충성심을 내보였다. 다행히도 보좌관이 총리에게 다가와 다음 스케줄 이동을 알리자, 총리의 얼굴 위로 원래의 위선적인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좋아. 그러면 전력의 세부 재배치는 여러분에게 맡기지. 최종 확인은 내가 직접 하겠어. 그러면 난 일정이 있어서 이만. 아큘라시온의 영혼에 영광 깃들라!"

"아큘라시온의 영혼에 영광 깃들라!" 총리의 경례에 장군들은 서로 질세라 일어나 큰 소리로 화답했다.


그들은 내내 공포에 질려 몰랐겠지만, 총리는 사실 오늘 회의에서 아무도 질책하거나 제거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완전히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실을 나온 총리는 문이 닫히자마자 평소 그 답지 않게 바쁜 걸음으로 상아색의 긴 복도를 질주하듯 나섰다. 바삐 걷는 그의 얼굴에는 설레이는 듯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는다는 악명높은 ‘단두대 미소’가 아닌, 순수한 기쁨으로 빛나는 소년같은 미소였다.


그 미소는 차량을 타고 역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계속 총리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대통령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할 때도 그는 평소와 달랐다. 대통령이 적국 프로살리아 에 합류하는 동맹국들이 점점 많아지는 상황과 아큘라시온 수도에서 커져가는 반전 시위들에 대해 늘상 그렇듯 힘없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불평하는 데도 총리는 아무런 대꾸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 앉혀준 은혜를 잊지말라며 대통령에게 윽박지르거나 그를 대놓고 무시하고 비난했을 텐데 말이다.


“자네답지 않은 분위기를 보니 오늘 뭔가 좋은 일이 있는가보군.” 둔감한 대통령마저 어느 순간 다른 점을 느끼고 총리의 기분을 살피자 총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 “뭐, 오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고 해두지.”


차량이 멈춘 전방의 기차역 앞은 한낮의 타오르는 열기로 가득했다. 근처에 포격이 있었는지 총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기를 가득 채운 매캐한 화약 냄새와 흙 먼지가 그를 덮쳤다. 그러나 총리는 오히려 상기된 표정으로 기꺼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 더운 공기를 한껏 폐에 채웠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사이렌도 오늘 그에게는 음악 같이 느껴졌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크롬장식으로 덮인 고급 수트의 옷매무새를 천천히 가다듬었다.


철로 위에는 의원들을 태워 국회가 있는 수도로 이동하기 위한 고속 열차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보좌관은 총리에게 열차의 앞쪽 칸 하나를 두 손으로 공손히 가리켰다. 총리는 그 열차 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열차에 탑승했다. 특별한 만남을 가질 시간이었다.


                                                                                     ***


총리가 올라탄 열차 칸은 의원들과 기업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VIP용 특별칸이었다. 좌석만이 줄지어 있는 일반칸과 달리, 특별칸에는 고급 소 가죽으로 된 갈색 좌석들이 넓은 간격으로 퍼져있고 넓은 미래형 차창과 취침실, 그리고 술과 음식을 위한 소형 바까지 갖춰져 있었다. 총리는 구두에 닿는 벨벳 카페트의 비현실적인 푹신함을 느끼며 칸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쪽 좌석에는 깡마른 30대 청년이 좌석에 앉아있었다. 곱슬인 갈색 머리에 도드라지는 광대뼈의 얼굴을 가진 청년, 알렉스 한센. 바로 총리가 찾던 그 남자였다.


"...어제 저녁, 아큘라시온 재계 5위의 사업가인 티로 회장이 프로살리아로 망명한 이유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아큘라시온을 망치는 독재정권을 비판했습니다. 티로 회장은 오래 전부터 아큘라시온의 트레스턴 녹스 총리의 측근으로 알려져 왔으며..."

"...아큘라시온 수도 광장에서 최근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서는 계속되는 전쟁의 종식과 독재타도가 구호로 외쳐졌으나 몇 시간 뒤 군인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제가 제3국의 입장에서 현재의 전황을 분석해 보았을 때, 아큘라시온의 처지는 그야말로 풍전등화라고 보아야죠. 계속 이렇다면 프로살리아가 한두달 정도면 승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청년은 차창에 여러 개의 홀로 스크린을 띄워놓은 채 외신 뉴스들을 보는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총리는 청년의 옆에 서서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호사가와 겁쟁이들은 항상 세상이 망하길 바란다네. 그래야만 자신들이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으니까.” 총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오자 청년의 어깨가 감전 된 것처럼 솟아올랐다.


총리는 성큼성큼 걸어가 마치 자신의 예약석이었던 것 마냥 청년의 옆 좌석에 털썩 앉았다. "만나서 반갑네, 한센군." 총리는 아까와 달리 실크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친근하게 말했다. 그의 정치 초기부터 지지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따뜻한 톤의 말투 그대로였다.


갑작스레 총리의 얼굴을 마주치게 된 청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어버린 듯 입을 열지 못했다. 서로 마주볼 수 있도록 회전 가능하게 설계된 좌석에는 사이에 작은 음료 테이블 하나만 놓여 있을 뿐 간격이 좁아서 서로의 눈을 피할만한 공간도 딱히 없었기에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총리를 불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VIP 칸 전체는 진공상태가 된 것 같았다.


차창에 뜬 여러 외신 채널들이 눈치없이 불편한 뉴스를 계속 쏟아내자 청년은 이들의 소리를 가리려고 급히 클래식 음악을 재생하였다. 음악의 시작에 맞춰 열차가 출발하자 녹스 총리쪽에서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미안하지만 자네가 모시는 캘본 의원은 사정이 있어서 연설장까지 따로 움직이게 되었네. 내가 대신 이 열차를 같이 타고 가도 괜찮겠지?"

"아...? 아 네네! 물론입니다 총리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청년은 손사래를 쳤다. 그는 총리를 향해 어색한 미소라도 지어보려고 했지만 극도의 긴장때문에 얼굴엔 어떤 표정도 지어지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마주볼 수 없어서 그는 총리의 수트 가슴 부분에 달린 순금훈장만을 계속 바라보았다. 전쟁 독려 홍보영상마다 총리가 옷에 달고 나오는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이런 청년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총리의 표정은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고맙네. 요즘 보안이슈들이 많아져서 보안실이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네." 눈 앞의 청년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는 걸 보면서도 총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이미 수없이 겪어 본 상황. 청년이 긴장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국회 본 회의 때나 연설 때 먼발치에서 보는 거면 모를까 일반 국회의원 보좌관이 일대일로 총리와 대면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총리는 그에게 거의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긴 했다. 그게 아니라도...널리 알려진 총리의 악명을 생각하면 그가 긴장한 게 아니라 겁먹은 거라 판단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총리님, 목적지인 국회 의사당까지 약 두 시간 소요될 예정입니다." 다른 칸에 있는 보좌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특별칸에 도착 시간을 전달하였다. 뒤이어 보좌관이 연설문을 전송한 듯 총리 옆 태블릿에서 알람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굳이 열어보지 않았다. 꽤 오래 준비한 연설문이라 이제와서 크게 고칠 부분은 없을 터였고, 청년과의 대화가 현재로서는 총리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무지개색의 작은 오팔 반지를 자꾸만 만지작 거리며 초조하게 있는 모습이 총리 눈에 들어왔다. 이 경직된 분위기를 계속 가져갈 수는 없었다.


"자네는 고향이 어딘가?" 총리가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 겸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옌입니다."

"오 그래? 동북부 출신이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내가 군에 있을 때 그 쪽 출신 친구들이 많았는데, 다들 큰 덩치를 가진 거친 산 사나이들이었지. 자네와는 달리 말이야."


청년이 그 말에 약간 발끈하여 대답했다. "3대가 계속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오래된 토박이죠. 저는 거칠게 자라지는 않았습니다만 덕분에 콘크리트 건물들보다는 높은 산과 너른 들판을 마음껏 볼 수 있었습니다."


총리는 악의가 없다는 표시로 손을 저으며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해하지 말아주게. 사실을 말해주자면 나도 북쪽 출신이야."

"네? 총리님의 연고지는 남부 사르망이시지 않습니까?"

"남쪽은 내 정치적 고향이고, 태어나서 자란 곳은 자네 고향과 머지 않은 북쪽 골디프라는 촌동네라네. 잘 알려지지 않은 내 작은 비밀이지."

"아, 전혀 몰랐습니다."

"하하 반갑수다, 선생.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이 놈의 북부 사투리는 입에 남아서 방심하면 튀어나오고는 한다네. 잘 고쳐지지를 않아."


청년은 고향 얘기에 살짝 긴장이 풀린 듯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오르고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분명 오랜만에 머릿 속 고향의 풍경을 떠올렸으리라.


"모옌엔 나도 자주 가봤지. 어릴 적 고모님이 거기에 사셔서 여름만 되면 한번씩 아버지와 신세지고는 했거든. 산맥이 제일 절경이지만 남부까지 흐르는 작은 강도 참 아름다운 곳이었어."


"네, 맞습니다. 모옌에 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죠."

"하, 말하고 보니 그립구만. 못 간지 오래 되었지만 가끔 잠들기 전 강에서 물놀이하던 여름이 생각난다네."

"저도 가끔 고향이 그립습니다. 제가 총리님이 말씀하신 그 강가에서 살았거든요. 낚시를 하다가 밤이 되면 할아버지께서 저를 무릎에 앉히고 옛 노래들을 불러주셨었죠."

"오, 우리 고모부도 그랬었지. 술만 마시면 부르던 노래가 지금도 생각나곤 해. 오래된 드라마 주제가라고 했었는데, 그 노래가. 가사가 뭐였더라... 노을이 지면, 모옌 언덕 위 아가씨가..."

"...아가씨가 춤을 춘다네. 못추는 춤을 춘다네."  즐겨부르던 노래인 듯 청년은 금방 다음 가사를 이어 부를 수 있었다. 총리도 기억을 되살려 노래를 이어 부르자 VIP 칸에는 기묘한 합창이 시작되었다.



- 노을이 지면, 모옌 언덕 위 아가씨가 춤을 춘다네. 못추는 춤을 춘다네. 


사랑하는 이 기다리며 춤을 춘다네. 못추는 춤을 춘다네. 


사랑하는 이 언젠가 카누를 타고 온다네. 못추는 춤 보러 온다네.



엉망인 합창이 끝나자 총리와 청년은 둘 다 파안대소 하고 말았다. 총리는 잠시 추억에 잠긴 듯 차창밖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고향 노래야. 자네 정말 북부 출신이 맞구만. 이 노래는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거든."

"저도 총리님 덕분에 오랜만에 추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둘은 한층 편안해진 표정을 교환하였다. 총리가 모옌에서의 추억 얘기를 더 꺼내보려고 했지만 보좌관의 호출이 그 분위기를 깨버렸다.



"총리님, 말씀 중 죄송하지만 사령부에서 아까 작전 변경안에 대한 최종결정을 내려달라고 합니다. 재배치 내역은 총리실에서 확인완료했습니다."

"아, 그래. 변경 내용 그대로 시행하라고 전하게. 거참, 저 친구는 좋은 분위기 깨는 재주가 있어."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 옆으로 한 때 아큘라시온에서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였던 거리의 모습이 지나갔다. 예전에는 이웃나라들과의 무역품들을 거래하는 상점들로 차들과 사람들이 넘쳐나던 거리와 도로였지만 이제는 거듭된 전쟁의 후유증으로 모두 노숙자들의 쉼터가 된 곳이었다. 빈 아스팔트 거리에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거리의 짙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노숙자들은 번쩍거리는 열차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차창으로 그 살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총리는 금세 관심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중앙 바에 가서 뒷편 냉장고를 뒤적거리다 이내 샴페인 한병을 찾아냈다.


"오, 좋은 샴페인이야. VIP 칸 관리자가 안목이 좀 있군." 총리는 이어 와인잔 두 개를 꺼내 샴페인을 잔에 조금씩 채워 그 중 한 잔을 청년에게 건넸다. 청년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총리님. 조금 있다가 국회 연설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자네도 꼭 내 보좌관처럼 빡빡하게 구는군. 괜찮아, 겨우 한 잔인걸. 다른 나라는 술 한잔 정도는 약으로도 마신다네. 가볍게 한 잔 들게, 총리로서의 명령이야."

"아, 네... 그러면 권하시니 한 잔만 하겠습니다."

"그렇지, 역시 동향사람끼리는 말이 잘 통하는군. 한 잔 하자구, 아큘라시온의 영혼에 영광 깃들라."

"아 네, 아큘라시온의 영혼에 영광 깃들라."


총리와 청년은 기분 좋게 샴페인을 한 잔씩 들이키고 이내 다른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술도 한 잔 들어가고 나니 청년은 한층 편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게다가 대화를 나눌수록 그들 사이에 공통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깨달으면서 청년은 애견 산책 같은 사소한 일상까지 총리에게 이야기할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잔만이라던 샴페인은 두 잔이, 세 잔이 되었다.


열차는 한 때 고층건물들이 가득하던 도시의 상업지구를 지나갔다. 숲을 이루며 공작처럼 넘치는 부를 자랑하던 고층건물들은 전쟁 초기 포격과 자폭드론의 표적이 되어 무너지거나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변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금은 그저 뼈다귀처럼 앙상하고 긴 그림자들만 도로에 드리울 뿐이었다. 그 거리 위로 보병들이 가까스로 열만 맞춘 채 전선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옆으로 거리 벽에 붙어있는 전쟁 초기의 선전 포스터들은 전부 빛이 바랜 채 죽은 뱀의 비늘처럼 힘없이 찢어져 바람에 날아다녔다. 열차 소리에 잠시 멈춰선 보병들은 그들과 반대로 수도를 향해 돌아가는 열차의 모습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차창의 음소거 된 뉴스들에서는 총리의 국회 연설 내용을 예측하면서 국제사회가 원하는 종전의 가능성보다는 전황에 대한 달콤한 거짓 이야기들과 청년들의 추가 참전을 독려하는 선동이 주가 될 것이라는 날 선 예측들을 분주히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VIP 칸은 어느새 그런 바깥 세상과 분리되어 있었다. 각자 가득 찬 술잔을 들고  바에 앉은 총리와 청년은 인간의 자유의지란 무엇인가에 대해 열띈 토론을 하고 있었다.


“각하께서도 이건 반박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수십년 전, ‘리벳 실험’이란 게 있었습니다. 피험자의 앞에 버튼을 놔두고 피험자가 아무 때나 버튼을 누르게 한 뒤에 그 두뇌 활동을 측정하고보니 버튼을 누르려고 의식적으로 마음 먹기 전에 이미 근육이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거죠. 즉, 그 사람의 의지보다 먼저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유의지가 아닌 무언가가 인간의 결정에 관여했다는 거죠.”

"흠, 대학 시절에 배운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 같군. 그래, 내가 백보 양보해서 정말 그 실험의 결과가 사실이라고 치자고. 그러면 자네는 그 실험대로 자유의지가 아닌 운명이 세상 일들을 결정한다는 게 괜찮다고 생각하는건가?"

“하하, 각하께서 마음에 안들어하시는 건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다만, 그 뒤로도 몇십년 동안 아직 이 결과가 반박 되지 못했던 걸 보면서 거대한 운명이 우리 인간들을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인간의 생이란 게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나?”

“전혀요. 그 운명 덕에 오늘 제가 위대한 각하를 이렇게 직접 뵙게 되었는데요. 이런 기분좋은 인연을 만들어준 운명에게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하, 이 친구 술이 좀 들어가더니 아주 능청스러워졌군!”


청년의 대답이 마음에 든 총리는 기분좋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는 청년의 잔에 샴페인을 부어주었다. 청년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샴페인을 홀짝이며 자신의 작은 승리를 만끽했다.


"총리님, 앞으로 50분 후면 연설장 도착입니다." 최근 화제가 된 유행어를 어설프게 따라하며 청년과 폭소하던 총리는 보좌관의 말을 듣고도 한참을 혼자 웃더니 눈물을 닦아낸 후에야 조금 진정하고 말했다.

"저 친구 정말 분위기 못 맞춘다니까.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내 정신 좀 보게. 하마터면 이걸 못 전해줄뻔 했네."


총리는 청년의 눈을 바라보다 문득 잊고 있던 선물이 생각난 것처럼 자리로 돌아가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서류 가방에서 실로 밀봉된 봉투를 꺼내어 바 테이블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잠시 여운을 즐기던 청년이 갑작스러운 봉투의 등장에 의아한 표정이 되자 총리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청년에게 설명했다.


"솔직히 말하지. 내가 오늘 이 열차에 탄 건 사실 우연이 아니라네. 보좌관에게 부탁을 해서 이 만남을 몇달 간 준비했었지. 거짓말을 해서 정말 미안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오래 전부터 자네를 꼭 만나보고 싶었거든." 총리는 청년의 앞에 놓여진 봉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네를 만나 이 선물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네."

"이게...뭐죠?" 청년이 살짝 웃음이 걷힌 얼굴로 건네받은 봉투를 열자, 그 안에서 얇은 전자 태블릿이 나왔다. 청년이 태블릿을 들고 검은색 대기화면 화면을 툭 건드리자 단 한 개의 작은 아이콘만이 그를 맞이했다. 청년은 잠시 주저하다가 기대하는 총리의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수많은 영상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찍힌 각기 다른 사진과 영상들이었다. 총리는 들뜬 목소리로 청년에게 말했다.


"정말 구하기 어려웠다네. 이렇게 세상 천지에 카메라가 깔려있고 온갖 영상들이 기록되는 세상인데도 검색이 되는 유사 인물 이미지가 거의 없더군. 오기가 생겨서 국내 최고 전문가들을 동원해 지난 50년의 국내 영상 데이터를 모두 스캔한 결과가 겨우 이 몇 개뿐이라네. 믿겨지나? 작업에만 1년을 꼬박 썼는데 겨우 이 정도 밖에 안나왔지. 아큘라시온 정보부 국장들도 자네보다는 카메라에 더 많이 찍혔을거야."


청년을 계속 바라보는 총리의 표정은 이제 웃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화면들을 눌러보았다. 총리가 건너편에서 청년이 보는 화면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건 2068년 모나 호텔 뒷 골목 CCTV에서 확보한 영상이야. 자네 모습 좀 보라구. 거의 30년 전 영상인데 마치 어제 찍힌 것 같지 않나? 어디보자, 상세 정보를 보면 기록된 날짜가 7월 26일인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익명의 투서 때문에 내가 호텔 준비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난 날과 같지. 그 다음 것도 보자구."


다음 영상으로 넘기는 청년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건 2073년 여름에 프로실리아 수도 광장에서 찍힌 영상인데 자네 꽃무늬 셔츠가 꽤 감각적이더군. 처음 볼 때부터 자네 밖에 보이지 않더란 말이야. 이 영상에 나도 곧 나올텐데, 아 저기 보이는 군. 이 때 내가 31살이던가? 막 첩보 부대에 배치된 초창기였을거야. 지금보다 많이 샤프한 거 보라구, 그리운 시절이지. 이 날은 또 잊을 수가 없어. 정보원 접선을 가던 중에 아주 '우연히도' 거리에 누군가 설치한 소형 폭탄이 폭발했고 그 바람에 스파이 동료들과 테러혐의로 구속되어서 사이좋게 1년을 꼬박 고문당했었거든. 그 땐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그것도 추억이야."


영상들을 재생할수록 청년의 안색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아, 그 영상은..." 총리가 다음 영상을 설명하려는 순간 청년이 주먹을 쥐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마치 훈련된 사냥개 같은 민첩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총리가 몰래 누른 버튼 한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온몸이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듯 꼼짝하지 못한 채 몸을 벌벌 떨던 청년은 잠시 뒤 정신을 잃고 열차의 고급 카페트 위에 나무등걸처럼 쓰러져 버렸다. 정신을 잃은 청년을 바라보는 총리의 눈빛은 어느새 먹이를 코 앞에 둔 뱀과 같이 건조하게 변해있었다. 총리는 청년의 감긴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한마디를 던졌다.


"반갑수다, 시간여행자 선생."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청년은 다시금 자신이 앉아있던 좌석에서 눈을 떴다. 반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총리의 시선을 느낀 청년은 괴성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고자 했지만 숨 소리만 겨우 나올 뿐, 목 아래로는 마비되어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그저 얼굴 측면의 핏줄만 푸르게 설 뿐이었다. 총리는 그런 청년을 바라보고 한쪽 손에 들고 있던 고급 샌드위치를 한입 더 베어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청년이 고개를 들어 본 차창 밖은 석양이 지고 난 후 옅은 보라색 어둠이 내려 앉고 있었다. 여전히 차창 홀로스크린에는 총리의 국회연설에 대한 예측 보도들이 뜨고 있어서 청년은 그가 마비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생각이 많아진 청년의 앞에서 가볍게 식사를 끝낸 총리는 손가락을 튕겨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게 한 뒤 입을 열었다. 가볍던 그의 목소리 톤은 어느새 모래사막이 생각날만큼 건조하게 바뀌어 있었다.


"드디어 일어났나? 다행이구만. 나도 나노 마취독은 처음 써보는 거라 조금 걱정했는데, 샴페인과 스위치가 그래도 제 기능을 해줬어. 아직 시제품이라 완벽하지는 않다고 하더군. 연구소장 말로는 30분 정도 밖에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다고 하니 천문학적 비용을 들인데 비해서는 상당히 비효율적 무기라고 봐야지. 그래도...30분이면 연설 전에 자네와 소소한 잡담 나누기에는 충분할 거야. 안 그런가 시간여행자 양반?"


청년은 더이상 거짓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총리 못지 않게 날선 말투가 되어 차갑게 대꾸하였다. "당신, 실수하는 거야. 곧 내 상태를 확인하면 내가 속한 ‘시간의 힘’ 교단에서 보복하기 위해 여기에 바로 사람을 보낼거야. 당장 나를 놓아주면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지."

“아 교단이군, 그렇지. 그랬겠지. 역시나 배후는 종교였어. 이런 미친 짓은 정치적 동기만으로는 할 수 없는 거니까.”

“이봐, 듣고 있는거야? 우리 교단 사람들이 당신의 숨통을 끊으러 올 거라고!”


총리는 청년의 날선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는 듯 짧게 손뼉을 치며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러면 한번 보자고. 1분이면 되겠나? 아니지, 오는 수고도 있는데 5분 정도는 기다려 줘야겠지." 총리는 청년을 향해 시선을 돌린 후 시니컬한 말투로 과장되게 초를 세었다. 마치 무슨 일이라고 벌어지길 기대하는 사람처럼. 10초가 남았을 때는 일부러 눈을 감기까지 했다. 허나 바깥은 고요할 뿐이었다.


"...5, 4, 3, 2, 1. 땡! 아무 일도 없구만, 시시하게." 총리는 온몸으로 발악하느라 흐트러진 청년의 셔츠 옷깃을 바로잡아 주고는 비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자네도 사실은 알고 있잖아. 자네가 말한 그 '보복'이란 건, 두 가지 이유로 일어날 수가 없다는 걸. 첫째로, 오늘 이 만남은 공식적으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록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자네의 그 잘난 '교단'에서 미래에 이 일을 알아낼 방법은 영원히 없겠지. 둘째, 애초에 내 목숨이 필요했다면 내가 열차에 탄 이후 지금까지 더 적당한 시간과 기회가 넘치게 있었어.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 걸로 알 수 있지 않나? 실은 교단에서 이 현재에 개입할 방법은 없다는 걸. 뭐, 어쩌면 자네가 본부에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말이야."


가소롭다는 총리의 눈빛에 맞서 노려보기만 하던 청년은 결국 총리의 말을 맞받아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청년은 패배를 인정하는 낮은 신음을 내뱉고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나같은 말단 신자를 구하러 올 사람은 없겠지. 그 대신 당신이 내게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전혀 없을 거야. 우리 말단들은 타임머신의 작동원리같은 고급정보를 전혀 모르니까."

"아, 그런 건 기대도 안했어." 총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청년을 무시했다. "내가 궁금했던 건 '어떻게'가 아니야. '왜'이지."


바로 지금부터가 총리가 그토록 바랬던 ‘그 순간’이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총리는 긴장을 감추기 위해 바 테이블로 걸어가 샴페인 한잔을 더 들이켜고는 청년 옆으로 돌아온 뒤 허리를 숙인 채 청년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보았다.


"나에 대해 말해봐." 총리의 질문을 듣는 청년의 얼굴에는 아까의 선량한 미소 대신 기계와 같은 무표정만 남아 있었다. 청년은 잠시 무용한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트레스턴 녹스, 55세. 현 아큘라시온의 총리이자 실질적 1인자.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의 이른 사망 이후 입양 가정들을 전전하는 유년시절을 보냄. 특별한 직업없이 떠돌다 20대 후반 입대, 같은 첩보 부대 출신인 가일 우드워드와 같이 쿠데타 후 독재정권 설립. 허수아비 대통령인 가일을 앞세워 실질적인 대중인기를 독차지. 포퓰리즘 정책과 반대 세력 유혈 탄압으로 다년 간 세력 유지. 불법 개헌으로 철권통치를 공고히 한 후에는 거세지는 반발을 피하기 위해 이웃나라와 명분없는 전쟁을 시작해 3년 째 진행 중이지. 오늘 국회 연설을 통해 그 전쟁은 더 연장될 예정이고."


청년의 거침없는 설명에 총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를 정말 잘 아는 군."

"오랫동안 당신을 지켜봐왔거든. 당신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총리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태블릿을 들고 청년의 눈 앞에서 영상들을 하나하나 넘겼다. "말은 바로 해야지.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잖아, 오랜시간 동안 나의 인생에 개입해서 나에게 고통을 주었지. 나를 호텔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적국에 잡혀서 고문당하게 하면서." 총리는 영상 중 가장 과거에 찍힌 영상을 틀고는 태블릿을 거의 청년의 눈 앞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댔다. 화면 속에는 보육원 앞 도로의 방범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입양 부모의 차량에 타는 어린시절의 총리와 그 모습을 건너편 인도에 서서 지켜보는 청년의 모습이 찍혀있는 영상. "내가 이 저주받을 가정에 들어가게 만든 전산오류도 네 작품이었겠지."


네 놈 같은 버러지는 채찍 맛을 봐야 해. 술만 마시면 벨트를 쥐던 붉은 손. 코를 찌르던 싸구려 위스키 향과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가죽 소리. 총리의 어린 시절을 내내 지배하던 악몽의 이유가 지금 그의 눈 앞에 앉아있었다. 청년은 총리의 타오르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제 알겠어. 내 수많은 불행의 순간에 네가 있었던 건...네가 그 순간들을 설계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총리는 몸을 일으켜 곧게 세운 뒤, 차가운 분노를 가득 담은 두 눈으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샴페인 잔을 깨뜨린 뒤 그걸 들고 청년의 얼굴을 조각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가까스로 냉정하고 냉소적인 자신의 가면을 유지하였다. 아직 중요한 진실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왜 나였지? 아큘라시온의 수천만명의 사람 중 왜 하필 나를 택한 거야?"

"...내가 그걸 왜 말할 거라고 생각하지?"

"어차피 네 목표가 무엇이든 이제는 실패했기 때문이지. 이 녹스를 이제는 너와 네 잘난 ‘시간의 힘’ 교단 뜻대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말이야."


청년은 총리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총리는 좌석에 앉아 마치 연설을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두 팔을 펼쳤다.


"좋아,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네가 입을 떼기 전 내 추측부터 말해주지. 네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계속 세웠던 가설이 있거든. 그 가설은, 너희가 결국 지도자가 될 나의 운명을 미리 알고 그 전에 나를 은밀하게 제거해서 아큘라시온이 위대한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는 거야. 지금까지 수도 없이 시도했었고, 그 때마다 실패했던 거지. 왜냐? 이 녹스라는 사람은 불행 따위에 굴복할줄 모르는 인물이기 때문이야. 빙하와 같은 냉정한 판단력과 코뿔소 같은 의지를 가지고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마다 다시 몸을 일으켜 불행에 맞서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네놈들에게 지지않고 내 두 손과 열정으로 이 아큘라시온을 더 위대하게 만들었지. 수탈받던 이 나라를 다시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대국으로 키워내고, 가난에 찌들어 무기력하던 국민들을 개조해서 성실한 일꾼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단 말이지, 바로 나 녹스가 말이야."


총리는 자신에게 몹시 취한 표정으로 한껏 허리를 펴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어때? 괜찮은 가설이지? 아니고서야 굳이 미래 아큘라시온 출신인 내부자를 선택할 이유가 없잖아? 어떤 방법이든 이론상 시간여행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들어가고 실패 확률도 높기 때문에  엄격한 조건에 부합하는 소수 밖에 이용할 수 없어. 그런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고 온 시간여행자가 역사적인 인물의 기구한 인생사나 구경하자고 과거로 오진 않았을테니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고 보이는데."


청년은 총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총리가 말하는 내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총리에게 암묵의 긍정으로 다가와 총리는 점점 더 의기양양해져 일어나 연극배우처럼 자문자답을 하기 시작했다.


"초조했겠지. 그렇지? 너희같은 비겁한 소인배들이 무슨 농간을 부리던 불행에서도 자꾸만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내 모습을 보고 불안했을 거야. 그래서 점점 초조해졌고 점점 이렇게 눈에 띌 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거야. 그러면 나를 제거하는 거사는 오늘 치를 생각이었나? 국회 연설을 통해 꺾이지 않는 투지를 보여주기 전에 나를 제거하려 했어?"


청년은 고개를 들어 차창을 바라보았다. 중계화면에는 총리를 제외한 모든 인원들이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멍청하게 허공을 보는 대통령의 얼굴, ‘미치광이’라는 별명의 전쟁광 국방부장관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총리는 청년의 그 시선을 눈치채고 중계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내 국회 연설이 목표였어. 이젠 과거처럼 나를 간접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어서 결국 무리해서라도 최후의 시도를 하려했던 거야. 아쉽게 되었군. 너희는 이번에도 나를 막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영 막지 못할 거야. 내가 이 차에서 내리고 나면 너는 내 친위대에 의해 영영 태양을 볼 수 없는 곳에 들어갈 운명이니까. 불쌍한 녀석. 그 안에서 내가 또 다시 역사적인 한 발짝을 내딛는 모습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게..."


"...너의 인생은." 청년이 갑자기 입을 열어 총리의 말을 끊자, 총리는 노여움으로 청년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 청년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총리와 눈을 맞추었을 때,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공포가 아니라 인자한 기쁨의 미소였기 때문이다. "너의 인생은, 나의 작품이란다."


"뭐라고? 네 놈 무슨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거냐?"

"그 말 그대로야. 지금의 너를 키워낸 게 바로 나라는 말이지." 총리는 청년의 솔직한 대답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름끼치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애정이었다.


청년은 웃었다. 그 어떤 위대한 배우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네 녀석, 결국 미쳐버린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우리 교단이 해왔던 모든 일이 오직 너를 위해서였다는 걸. 잔혹하고 비열한 2인자, 아큘라시온을 전쟁으로 이끌어 몰락하게 할 타락한 지도자. 그게 내가, 우리가 너에게 원했던 모습이라는 걸."


총리의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짓밟으면서 그는 사람의 숨겨진 감정을 정확히 읽어내는 데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건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본능적인 결론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년의 눈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오직 맑은 기쁨 뿐이라는 것. 청년의 모든 말은 진심이라는 결론 말이다.


"이해할 수 없군. 내 인생이 계획된 결과라고?"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설계되었지." 청년은 자랑스럽다는 말투로 얘기했했다. "네 말대로 옛 집에 불을 지른 것도 나야. 내가 그랬지. 네가 인정많은 친척들에게 옮겨갈 수 없게, 보육원을 통해 학대가정으로 보내지려면 방해물이 없어져야 했거든."


총리는 옛 집을 떠올리며 어린시절, 멀리서 폐까지 파고들던 잿가루, 가녀린 들숨에 쏟아져 들어오던 열기, 조각만 남기고 타버린 가족사진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다. 총리의 고통스러운 회상을 알아채고도 청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과장되게 돌려 태블릿 화면 위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수도 광장 영상을 눈으로 가리켰다.


"아, 저 광장도 아주 생생히 기억나. 여기 노천 카페에서 팔던 카페모카가 아주 달콤했거든. 네가 비밀 경찰들에게 잡혀가는 걸 지켜보며 마실 때는 더 달콤하게 느껴지더군."

"네 놈 때문에 난 긴 시간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어."

"그 대신, 전우를 얻었잖아. 생사고락을 같이 한, 목숨을 맡길 수 있게 된 의형제. 지금의 대통령을 말이야.” 청년은 오랜 비밀들을 고백하며 점점 들뜨는 자신을 발견했다.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한없이 움츠러든 총리와 달리 기세등등해진 청년은 마술의 원리를 관객에게 조곤조곤 설명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대체 왜 나였지?" 총리의 질문은 아까와는 달리 힘이 없었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왜 너일 수밖에 없었는지." 청년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조실부모한 외톨이 아웃사이더. 잔혹하고 냉정한 성격에 뛰어난 지능. 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남을 이기고 싶어하는 경쟁심까지. 너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독재자들의 덕목들을 골고루 갖춘 인재였어."


"그 말인 즉슨, 내가 인간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를 지도자로 만들기로 했다는 말인가? 겨우 그런 이유로 내 인생을 끊임없이 망가뜨리고, 나를 진흙밭에 쳐박았다고?" 총리는 경악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뭐, 생각보다 심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청년의 말에 발끈한 총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청년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 잡았다. 당장이라도 목뼈를 부러뜨릴 기세였지만 청년은 그에 지지않을만큼 형형한 눈빛을 하고 총리와 마주보았다. 총리의 목소리는 분노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네까짓 놈이 뭔데 감히 내 인격을 평가해?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고통스러운 투쟁 대신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어. 네가 날 타락시킨 거야!"

"하! 이거 봐. 역시 자의식 과잉이라니까. 하기야 그래서 내가 널 아끼기는 했지."


청년이 비꼬며 말했다. 청년은 목이 졸려 숨을 몰아쉬면서도 총리의 충혈된 눈을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아보이기도 했했다. 총리가 손아귀에 힘을 푼 뒤, 둘 사이에는 잠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열차 차창 밖으로 가까워지는 국회의사당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 자신하던 총리의 생각과 달리 남은 심문 시간은 많지 않아보였다.


"넌 나를 몰라." 총리의 입에서는 생기없는, 바람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 네가 오히려 너 자신을 모르지." 청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는 어느 새부터인가 말을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까 네 말 중 한 가지는 정확하게 맞았어. 교단에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것. 근데 그 이유는 틀렸지." 청년은 손을 들어 설명하려다가 마비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목을 까딱한 다음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같은 말투로 총리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평행우주 이론'이라는 걸 들어봤나?"

"하, 이 상황에서 내게 강의를 하겠다고?" 총리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했다.

"걱정마, 짧게 끝나니까. 네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한 사소한 상식이라구. 자, 질문 하나, 나같은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와서 정해져 있던 과거를 바꾸면 미래가 어떻게 될까?"


"미래가 그 결과로 완전히 바뀌겠지." 총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땡! 아쉽군. 미래는 바뀌지 않아. 그냥 바뀐 미래가 하나 더 생길 뿐이지, 양자역학적으로 말이야. 달리는 열차 앞으로 새로운 미래라는 철로가 하나 더 생겨난 거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때 그 때 생겨난 철로들로 바꿔 달리게 되고 말이야."


"영화에서 많이 나오던 가설이군."

"맞아. 그리고 우리는 그 수많은 가능성들로 이루어진 시간 선 중 하나에 살고 있을 뿐이지. 나는 교단의 명을 받고 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기에 '위대한 아큘라시온의 지도자 녹스'가 있는 시간 선을 만들러 온 거야. 다신 돌아갈 수 없는 편도행 티켓을 손에 쥐고 말이지."


총리가 청년의 설명을 듣다가 길을 잃은 표정을 짓자 청년이 그 표정을 읽고 말을 더했다.


"아, 내가 아닌 네 얘기를 해줘야지. 미안하군. 미래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선택받은 신자들은 자신이 올바른 길을 만들고 있는 지 계속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어. 그래서 교단은 연구 끝에 우리 각자가 있는 시간선의 정보를 공유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지. 신자들이 과거를 바꾸면서 만들어진 셀 수 없는 시간 선들에서 요청/수집한 각종 정보들이 교단이 있는 미래 어느 시점에 통합되어 저장되었다가 우리에게 오는 거야. 난 그 시스템을 통해 수많은 시간 선 속의 네 정보를 보았고 말이야."


총리는 그제서야 청년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깨달았다. 청년은 말했다. "내가 없었더라면 네 운명은 더 비참한 길로 흘러 갔을 거야. 수많은 시간 선 중 대부분에서 너는 사기와 협잡을 일삼다 감옥에서 여생을 보냈거나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무능력한 필부로 살면서 자신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세상만 원망하다가 시골 구석 술집에서 이른 생을 객사로 마감했지."


"네 놈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군."

"믿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네게 안좋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년은 다시금 동정어린 미소를 띄고 총리에게 말했다. "내가 너의 인생을 여기까지 끌어올려준거야. 약간의 불행들을 재료로 네 비참한 미래들을 지우고 네 악마적 재능을 꽃피워 이 아큘라시온의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해준 거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너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나 다름없다는 걸."


총리는 청년에게서 손을 뗀 후, 힘없이 좌석에 앉아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다만 증오로 가득찬 눈빛 만은 거두지 않았다. "왜...왜 이렇게까지 한 거지? 너도 아큘라시온 출신이잖아? 나를 독재자로 만들어서 너의 조국을 망가뜨리면 너나 너희 교단이 얻는 게 뭐야?"


"넌...내가 어떤 미래에서 왔는지 몰라." 청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운 시간 선이 지속되면 약 100년 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나? 고도로 발달한 의학으로 끝없이 증식한 인류와 더이상 그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자원이 결국 한계점에 도달하게 돼. 우리 후손들은 그걸 '필연적 임계점'이라고 부르지. 어느 순간 수많은 종의 생물들이 이유없이 멸종되기 시작하고 그에 맞물려서 퍼지는 질병들로 인간들도 병들게 돼. 자원이 더이상 늘어나지 않은 채 고갈 속도만 빨라져서 10년도 안되어 생지옥이 펼쳐지게 되지.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아? 말라비틀어진 땅 위에서 1년치 식량 배급권을 받으려고 부모가 자식을 팔아 넘기고 깨끗한 물 한통에 사람을 죽이는 게 전혀 특별하지 않은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식인까지 불사하는 사람들을 피해 지하에 숨어다니고 아큘라시온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언어조차 잊은 채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그런 미래가 내가 살던 시간대야."


청년은 자신이 살던 미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나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귀한 가치'라고? 하! 내 시간 선을 네가 살아봤다면 감히 '가치'라는 오만한 말따위는 그 입에 담지도 못할거야."


"그래서...너희 교단이 찾아낸 해결책이란 게 시간여행으로 독재자를 키워내는 거라고?"

"정확히는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 독재자들을 키워내는 거지. 너와 같은 적합자들을 찾아서.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의 행동들은 하나하나 모두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신의 이름 하에 행해지는 거야. 위대한 신이시여 우리 인류를 부디 올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청년은 말이 끝난 뒤 진심어린 표정으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총리는 그 당당함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너희가 진정 인류의 미래를 위했다면 과거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거나 우주 개척을 하는 등 다른 방법을 시도할 수도 있었잖아. 꼭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갔어야 했나?"


"본인만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네 녀석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은데." 청년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우리는 미래 인류를 대표해서 너희 과거 인류를 벌하는 거야. 죄는 너희 과거인들이 지었으니까. 미래에 지옥이 올 것을 알고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이른바 미필적 고의라는 죄를 저지른 거지. 우리같은 사도들이 신을 대신하여 너희에게 그 죄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이니, 달게 받아야지."


"이런 오만한 새끼들."

"받아들여, 이 시간선의 운명은 이미 그렇게 정해졌으니까."


총리의 눈에 열차에 점점 가까워지는 국회 의사당이 보였다. 청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이번 연설로 아큘라시온과 프리실리아에 사는 인류는 더 오랜시간동안 전쟁을 벌이고, 더 많은 희생자를 쏟아내며 ‘천벌’을 받을 운명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가 연설을 포기한다고 전쟁이 멈출까? 총리는 살면서 여태껏 느껴본적 없는, 끝없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하나만 더 묻지. 이제와서 내게 사실을 말해주는 이유가 뭐야?" 총리는 물음을 던졌지만, 어느 정도는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년은 이제 온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후회 따위 없는, 굳건한 신념으로 가득한 얼굴. 총리가 군에서, 전장을 다니며 많이 보았던 얼굴이었다.


"이미 전쟁이라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힘차게 굴러가고 있거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게 될지 미리 알려주지. 네가 벌인 전쟁에 곧 다른 나라들이 참전하게 되면서 또 한번의 세계대전이 펼쳐질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이 흐름에 휩쓸려 목숨을 잃겠지. 네 덕분에 많은 과거 인들이 합당한 벌을 받게 되는 거야. 그리고 이제와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 운명은 변하지 않게 되었어."


청년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국회의사당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정신적 부모로서 너에게 사실을 말해주는 거야. 너는 내 소중한 작품이니까. 아이야, 굴하지 말고 계속 너의 길을 가렴. 이제 와서 착한 척, 뉘우친 척하지마.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청년은 비릿하게 웃었다. “이건 너의 운명이야. 아까 말했잖아. 내가 과거로 와서 너를 선택한 것도, 네가 악마적인 재능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거대한 운명인 거야. 그러니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느라 힘쓰지 말고 네 DNA에 새겨진 본성대로 기꺼이 칼춤을 추려무나."


총리는 청년의 말에 침묵한 채 자신의 잔혹한 운명을 한참 곱씹었다.


"총리님, 곧 국회의사당에 도착합니다." 보좌관의 방송이 나오자, 총리는 지친 표정으로 청년을 마주보았다. "그래, 네 말대로 이제 내 칼춤을 멈출 수는 없겠지. 멈추기엔 너무 긴 시간 동안 소모전을 해왔어. 미래인 얘기를 해봤자 미친 게 틀림없다는 얘기나 들을테고 사방에서 정적들이 좋다고 나를 물어뜯겠지. 좋아, 기꺼이 악역을 계속 맡아주지." 그렇게 말하는 총리의 눈은 분노로 핏줄이 붉게 서 있었다. 하지만 입에는...그의 입에는 예의 사악한 미소가 다시 떠올라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대신 너에게도 깜짝 선물을 하나 더 주지. 이건 내가 미리 준비해놓았던 네 운명이야." 총리는 자신의 단말기를 집어 암호를 입력하더니 홀로그램을 띄웠다. 몇 시간 전 국방부 워게임 시뮬레이터에 띄워놓고 참모들과 같이 이야기했던, 바로 그 홀로그램이었다. 총리가 손가락으로 군사 작전지역을 가리켰을 때, 청년은 그 '선물'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경악했다.


"눈에 익은 풍경이지? 너에 대해 미리 조사는 해놨었지만, 확신할 수 있던 건 오직 네 출신밖에 없더군. 그것마저 거짓은 아닐까 싶어 마지막 확인이 필요했어. 다행히도, 네 고향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그 노래, 그 장소에 대한 추억들은 쉽게 만들 수 없는 것들이니까." 총리의 손가락 끝에는 청년의 고향이라던, 높은 언덕과 작은 강이 있는 시골, 모옌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붉은 색 작전 선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생기게 될지 미리 알려주지." 청년을 바라보는 총리의 눈이 다시금 번뜩였다. "내가 이 열차에 타기 전 변경하고 아까 이 자리에서 최종 결정을 내린 군사 작전이 곧 시작되면 내일 새벽부터 우리의 동부군이 이 붉은 색 루트를 따라 진격할 거야. 프리실리아가 그 루트를 쉽게 발견한 뒤 군사 대응을 시작하게 되면 네 고향 땅에서 대 전투가 일어나겠지. 수많은 탱크와 장갑차들, 드론들,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이 땅 위에서 맞붙는 거야." 총리의 설명을 듣는 청년의 눈도 분노로 붉어졌지만 총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상컨대 이 빌어먹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저 지역에서의 전투는 끝나지 않을 거야. 지루한 고지전과 땅따먹기가 반복되겠지.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몇 년 동안 저 땅은 풀 한 포기 자라나지 못하는 불모지가 될거야. 어쩌면 전쟁이 끝나도 몇 십년 간 분쟁 지역이 될 수도 있겠지. 그 오랜 시간 동안 네가 어린시절 눈에 담았던 산들은 처참히 파헤쳐지고, 강은 말라 비틀어질 거야. 너의 고향 집을 비롯해서 모든 건물들은 폐허가 되겠지. 누구인지 모를 너의 조상들은 저 땅에서 전투에 동원되어 죽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질테고. 결국 저 땅에서는 미래의 너를 비롯해서 어떤 생명도 태어나거나 자라나지 못하게 되는거야." 청년의 얼굴이 분노로 가득차자, 총리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움직이지 못하는 청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밀었다.


"내가 내 모든 걸 걸고 꼭 그렇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지. 너라는 존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 세상에서 영영 지워주겠어. 그리고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할 어두운 지하에서 살아서 그 가혹한 운명을 똑똑히 지켜보게 해주마. 과거인들을 대표해서 너에게 내리는 벌이니, 너도 달게 받아야지."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국회의사당 앞에 멈추자, 총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변한 채 옷깃을 가볍게 다듬었다. 그는 이어 잘 꾸며진, 사람좋은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청년에게 나직이 말했다. "아큘라시온의 영혼에 영광 깃들라. 네 놈도 느껴보도록 해라. 모든 운명이 정해진 자의 절망과 분노를 말이야."


덜컥, 탁. 열차 문이 열렸다 닫힌 뒤, 열차 칸 안에는 불이 꺼지고 고요함만이 가득해졌다. 차창에 있는 홀로스크린들이 곧 모두 총리의 등장을 중계하기 시작하면서 어두운 열차 칸은 스크린에서 새어나오는 색들로 물들었다. 화면 속에서 총리는 억지로 꾸며낸 미소를 하고 손을 흔들며 국회의사당 계단 위 붉은 카펫을 아무런 말없이 걸어 올라갔다. 청년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말없이 그 중계 장면을 지켜보다가 이윽고…웃기 시작했다. 광기어린, 그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웃음이 마치 발작처럼 터져나왔다.



"하하하하!!!! 결국 내가 해냈어! 해내고 말았어! 내가 결국엔 가장 완벽한 악마를 만들어내고야 만 거야! 하하하하하!!!!!"


텅빈 열차 칸 안에는 그가 비명처럼 내지르는 혼잣말과 웃음만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 브릿G(https://britg.kr/)에서 SF 단편소설들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가다 관심 생기는 글이 있으시면 한번씩 관심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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