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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27. 2023

책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

독서와 기록을 하는 이유

기억을 강화하는 건 '반복'이다. 하지만 공장의 기계처럼 무심한 반복은,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이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듯, 목적을 잃은 채 방황하게 만든다. 또한 놀이가 아닌 재미없는 반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게다가 반복은 주로 학습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노션에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수식 2.0을 입력'하는 것들 따위는 반복해야 익숙해진다는 것은 알지만, 재미가 없으니 반복과는 거리가 멀다. 반복하려면 당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근은 맛이 별로 없다…


마지못해 책을 읽는다. '프로 일잘러'가 되어야 하니 재미없는 노션 문법책도 의무적으로 읽어 내려 한다. 하루 읽다가 바로 던져버린다. 아, 책을 읽는 습관도 망했고 당찬 각오로 가득했던 초심도 망했다.


나는 직장인이다. 하루 시간의 40%를 법인이라는 추상적인 존재에 헌신한다. 이 일상은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의 캐릭터들이 겪는 내적 갈등처럼, 내가 만들어야 할 정체성과 일의 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반복, 또 반복. 같은 업무의 무한 반복, 같은 사람과 비슷한 일을 하는 무한 반복, 새벽어둠을 뚫고 출근하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대표의 요구사항을 처리하고,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한숨을 크게 쉬고, 맛없고 비싼 점심을 사 먹고, 코딩과 같은 싸움을 반복하고,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지쳐 쓰러지는 삶. 그렇게 단순하고 비슷한 일들이 저주처럼 반복되는 삶을 산다. 사람은 고통과 괴로움을 맛보아야 거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다. 얼마나 재미없는 반복에 빠져 살았는지 깨달아야 그 반복에서 탈출할 아이디어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



습관은 반복의 산물이다. 반복 없이는 습관의 탄생이 불가능하다. 지루한 일상도 필요하니까 반복할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 문장을 기록하는 행위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속 주인공이 겪는 일상의 단조로움처럼, 예측 가능하면서도 필수적이다. 읽고 기억하는 관념적인 과정의 반복과 일상에서 실천하는 행위가 같이 조합된 반복, 즉 상당한 수고가 동반되는 반복이다. 하지만 읽고 기록하는 행위가 그저 반복이라는 사실은 이해하지만 현실에서 실천하기 쉽지 않다. 거기에는 뭔가 생산적이라는 목적,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당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복은 무의식이 만든다. 직장인으로서 삶은 스스로의 무의식이 만든 결과다. 무의식은 과거로 나를 가둬버린다. 무의식을 개조해야 그 안에 다른 걸 넣을 수 있다.


반복은 나쁜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반복을 잘 써먹으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다. 우린 책을 읽고 문장을 기록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싶다. 반복이 뇌의 어떤 부분을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안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는 도서관과 같아서 거기에서 신경 세포라는 책들을 서로 연결시키며 기억을 강화한다. 기존에 저장된 정보와 새롭게 투입되는 정보는 서로 교류하며 자신을 더 성장시킨다. 기억은 고립된 섬이 아니라, 네트워크처럼 서로 연결되고 조합되면서 더 오래 살 수 있다. 새로운 기억은 기존의 기억의 토대 위에서 그것을 양분 삼아 자라나는 셈이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정글짐의 제일 꼭대기를 두려워했다. 무섭다고 회피할 수는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그곳을 두발로만 뛰어다녔으니까. 두려움을 떨쳐내고 한 발을 디디게 되면 자신감이 자라난다. 안전함과 위험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얼마나 스릴을 제공하는지 체험하면 알게 된다. 용기와 반복을 통해서 그 꼭대기가 얼마나 재미있는 곳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절대 올라서지 못했다.


거창하지만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것 역시 정글짐 꼭대기만큼이나 두려운 높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위험하진 않다.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의외로 재미까지 느낄 수 있다. 단순한 반복이긴 하지만 과정을 견뎌내다 보면,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처럼 주인공의 미묘한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바로 ‘앎’이라는 것이다. 앎은 지혜를 잉태하며 우리를 깨우치게 만들기까지 한다. 게다가 기록의 경험은 절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비록 내가 아닌 외부의 공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어쨌든 그것은 내 영역 범위 안에 늘 존재할 테니까.



문제는 때로 기록했다는 것 자체를 통째로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걸 어디에 기록했는지조차 잊는다는 데 있다. 그러니 책을 읽고 나름 인상 깊은 문장을 기록하겠다고 설쳐댄들, ‘어차피 모두 기억에서 잘려나간 책들의 사생아가 아닌가.’ 이런 죽은 무의식이 또다시 살아 있는 의식을 지배하려고 한다. 책을 읽고 기록하고 실행하려는 것은 결국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의욕적인 행위다.


내가 원하는 것은 책 속의 문장을 더 오래 기억하는 일이다. 더 오래 기억해서 그 감동적인 경험을 지속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몹쓸 기억력은 거의 치매환자처럼 작동한다. 책 한 권을 완독했다면 적어도 한 문장만이라도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금세 까먹는다. 내가 그 책을 완독한 사실조차 몇 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반복을 이렇게 응용해 보면 어떨까?


기존: 책을 읽고 밑줄을 치고 그 부분을 구글킵이나 노션에 기록한다.


변화 1 : 거기에 내 의견을 간략하게 더한다.

변화 2 : 일상에서 실천할 만한 액션 아이템을 찾아 단 한 가지라도 실천한다.(예: 낭독, 토론하기, 글쓰기)

변화 3 : 더 오래 기억하도록 퀴즈를 만들어서 재학습한다.

변화 4 : 문장에 어울리는 예술 작품이나 음악을 찾아서 문장에 더해본다.

변화 5 : 개념을 놓고 친구와 의견을 나눠본다.

변화 6 : 챗GPT와 대화하면서 어려운 개념을 이해한다. 대화하면서 개념을 자동적으로 파악하고 학습한다.

변화 7 : 나만의 콘텐츠로 제작해 본다.(글쓰기, 유튜브 영상 제작하기)

변화 8 : 모임을 만들어서 그 주제로 남들과 토론을 해본다.

변화 9 : 기록한 메모들을 서로 연결해 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한다.(해마가 기억하기 위해 연결하는 방식처럼)




머리에서 휘발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안다. 반복 또 반복이다. 아까 그 재미없는 반복 말이다. 다만 재미없고 지루하게 단순 반복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도모하면서 반복하는 것이다. 내 경우는 말이다. 단순한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라, 또한 늘 새롭고 낯선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무의식적으로 변화를 갈망했다. 관성적인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 변화를 추구하도록 이끌었다고 할까? 하이라이트 된 모든 문장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는 변화를 계속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밑줄을 치고 그 밑에 사견을 담는다. 따라서 굳이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한 번 들여다보자.


"모든 행복한 가족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족은 나름의 방식으로 불행하다."


마치 불행한 가족이 다른 방식으로 불행한 것처럼 이 문장도 불행한 형태로 남겨두긴 싫다. 이 문장은 번역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변형된다. 이 문장을 뜯어고쳐보거나 내 인생에 비춰보거나, 그걸 가지고 글을 써보거나, 어쨌든 변화를 택한다. 이 문장을 원문 그대로 외우긴 어렵다. 따라서 나는 마치 번역서마다 형태는 다르지만 문맥이 같은 지점을 지향하는 것처럼, 문맥 그 자체, 그러니까 그림의 외곽선을 따는 것처럼 형태적으로 외운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모습으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불행한 이유가 있다, 이런 식으로 변형해가며. 나는 톨스토이의 저명한 문장을 접하면서 기억이란 흐름이라는 사실을 얼핏 깨닫는다. 억척스럽고 고집스럽게 한 문장을 그대로 소화시키겠다는 어리석은 자세보다는 문장이 기억의 계곡을 따라서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흐름 자체를, 문맥과 문맥이 품은 구조를 짚어내는 일이야말로 뇌의 기억장치에 영구적으로 보관하는 방법이 아닌가 판단이 든다는 것이다.


문장은 억지로 외울 필요가 없다. 일단 그 느낌, 감성을 마음에 간직하는 게 첫 번째고 문장을 통해서 실생활에서 어떻게 응용을 해볼 것이냐, 그것이 두 번째다. 그런 과정을 자연스럽게 거치면 외우려고 할 필요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느낌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비의지적으로 그 문장이 살아날 것이다.


물론 더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이유가 우리를 기록으로 이끈다. '세컨드 브레인'이라는 말처럼 구글킵이나 노션, 혹은 옵시디언과 같은 툴은 우리의 기억력을 보조할 수 있는 툴로 변신한다. 기억은 머릿속뿐만 아니라 저장 장치인 도구에 심어놓으면 필요할 때, 잘 뒤적거리기만 하면 재빨리 써먹을 수 있을 테니.




기억이란 무엇일까? 뇌과학을 심층 있게 공부하면 그래서 그 기억이 뇌에 저장되는 원리를 깨달으면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나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쉽게 꾸밀 수 있을까? 그래, 뇌과학을 이참에 공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물론 나는 뇌과학자도, 기록하는 일을 집착스럽게 연구하는 실험정신이 투철한 탐험가도 아니다. 다만 심플하게 오늘 읽은 책에서 단 한 문장이라도 머릿속에 오래 심어두고 싶다는 거다. 그렇게 머릿속에 심어둔 생각이 발화되어서 어디선가 글을 쓸 때나 강연장에서 강의할 때 불현듯 애드리브를 치는 것처럼 떠오르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거의 20년 가까이 구글킵에 독서 문장을 기록하고 있다. 대체 몇 편의 메모를 남겼는지 이제 그 규모조차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구글킴에 접속해서 끝도 없이 늘어선 메모의 행렬을 보면 마음이 뿌듯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건 전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세컨드 브레인이라고 이름을 그럴싸하게 정해놓고 키워드로 검색만 하면 수많은 메모들이 뛰쳐나오긴 하지만, 검색할 때마다 새롭기만 하다. 그래도 나는 언제든 저 메모 덩어리들을 내 눈앞으로 데려올 수 있다. 기억력은 해마처럼 새로운 문장과 저 구글킵의 문장과 서로 연결되면서 다시 강화될 테니까.


어디에 기록해뒀는지 찾는 데 애를 먹을 수는 있겠지만 일단 기록해두면 기억은 우리의 모자란 기억력을 보조할 수 있다. 일부러 지우지 않는 이상, 구글이나 노션이 망하지 않는 이상, 그 데이터는 영원히 남아있을 테니까 말이다. 파이(π)를 소수점 아래 10만 자리 넘게 외워서 유명해진 사람도 아내의 생일을 잊거나 지금 자신이 거실에 뭘 하러 나와 있는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그 사람도 그럴 때는 자신의 모자란 기억력을 탓하지 않고 여유 있게 메모 툴을 뒤적거리는 건 아닐까?


기억은 기억하고 싶은 무언가를 기록하고 다시 보고 그것을 써먹는 과정이 반복되면 뇌의 어딘가에 각인이 되는 개념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록하는 과정을 점검하고 어떻게 그것을 써먹고 있는지, 그러니까 나 스스로에게 피드백을 냉정하게 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여러 변화를 경험했다. 구글킵, 노션, 캔바, 종이책, 전자책, 독서대, 인덱스 하이라이터, 해마, 뉴런, 시냅스, OCR, 제텔카스텐, 세컨드 브레인과 같은 온갖 개념과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기억의 패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그걸 써먹을 수 있으니까.


기억은 흐름은 기존의 기억과 새로운 기억을 연결하는 해마의 과정이라는 단순한 원리를 깨닫게 되면, 그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솔루션으로 진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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