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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04. 2024

몰락해 가는 시간

현재 베트남에 있다. 베트남에 온 것은 업무(출장)라는 목적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일에만 매진하면 그뿐인 것이다. 일과 관련 없는 것들, 말하자면 독서, 글쓰기 혹은 사유에 이르기까지 다른 모든 것들은 이곳에서 무시된다. 무시되는 이유는 환경적인 것에서 오는지 내면에서 오는지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우선순위 때문일 것이다. 그래, 우선순위가 전부다.


마음은 비교적 밝다. 업무에 지칠 때가 많지만 이 시간에 온전히 나를 바치는 일이 후회되진 않는다. 주어진 직분에 그저 충실할 뿐이니까. 내 역할이 아직 온전하다는 사실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의 선택을 합리화 시킨다.


삶에는 항상 여러 우선순위가 따라다닌다. 매 순간, 어쩌면 100분의 1초, 즉 100 헤르츠 단위로 나는 선택에 직면한다. 선택은 물론 직관적이다. 이익과 불이익을 따지건 어느 선택이 더 이로운 것이건, 결과는 예상할 수 없다. 다만 본능에 순순히 응하는 게 이 세계 일의 전부다.


이곳 베트남에서 나는 일을 한다. 지독하게 한 달 가까이 데이터와 씨름하느라 머리를 쓴다. 이제 이곳에 온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노매드처럼 한 달 살이를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니 나는 그 명령에 순순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인간이라서 나는 나의 선택을 부정하려 든다. 과연 내 선택이 맞았을까? 왜 나는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오직 일에만 충실하는가? 무겁게 챙겨 온 독서를 향한 열망을 왜 캐리어 깊숙한 곳에 감춰두고 외면하려 하는가. 왜 나는 점점 글쓰기에서 멀어지려 하는가?


질문이 도착하면 답은 마치 변명처럼 준비를 시작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시간이 없다고. 그래 시간은 없다. 아니 시간은 존재하지 않겠지. 그런데 시간에 대해서 내가 논증하려 드는 것은 내 영역 밖의 일이다. 그러니 시간이 없다는 말은 어쩌면 에너지가 없다는 말로 번역된다. 내 변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인 에너지가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에너지가 없을까? 에너지는 총량의 법칙을 따른다. 하루 동안의 에너지, 일주일의 에너지, 한 달의 에너지, 인생의 총 에너지,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적이고 내가 지금 이 순간 끌리는 즉 에너지를 쓰고 싶은 것은 글쓰기와 독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나는 지금 끌리지 않는 글을 쓰고 있을까? 그 질문에 역시 변명만 늘어놓을 것 같아서 대답은 굳이 찾고 싶지 않다. 모아둔 약간의 에너지를 이곳에 쏟고 있음이 아닐까, 가정하는 것일 뿐. 뭔가가 나를 여기로 이끌었을 지도.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의도보다 이 순간의 기억과 생각을 잠시 보존해두고 싶은 이유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베트남에서, 성실한 직장인으로서 열심히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림으로써 나는 어떤 단단한 지위를 획득하게 될지도 모른다. 열심, 성실, 최선 이런 단어가 치장된 지위를.


에너지는 점점 고갈된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과거의 폭발할 것 같던 열정이 점점 사라진다는 걸 직감한다. 쉬어도, 백설공주처럼 실컷 잠을 자도 소모된 에너지는 채워지지 않는다. 배터리가 점점 자신의 효율성을 잃어가는 것처럼, 나 역시 점점 복구될 수 없는 지점을 향해서 가라앉는 중이다.


몰락은 예견된 것이다. 그러니 실망할 필요도 근거 없는 희망을 역으로 품을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주어직 직분에 충실하게, 마음에 끌리지 않는 일들을 외면하며 살면 된다. 설마 그 외면하는 일들이 영속적으로 독서와 글쓰기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


일이 재미 있는 이유는 베트남에 내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열심히 코딩을 하다 들은 앤디 윌리암스의 음악 때문이었을지도.


https://www.youtube.com/watch?v=w6w0cy_1HY4&ab_channel=RachelR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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