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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09. 2024

매일 4천 자를 쓴다는 것

매일 똑같이 규정된 시간에 정해진 분량만큼 쓴다. 더도 덜도 아닌 딱 4천 자 내외. 그 이상 쓰고 싶지만, 에너지가 부족하다. 4천 자를 완성하지 못하면 나는 자리에서 계속 얼어붙은 존재로 남아야 한다. 몇십 분이 걸릴지 몇 시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다.


49인치 울트라 커브드 모니터 중앙에 스크리브너가 자리 잡고 내 태도를 감시한다. 커서는 하얀 백지 위에서 점멸등처럼 깜빡이고, 스테이터스 바 모서리에는 내가 입력한 글자들이 숫자로 가공되어 출현한다. 나는 백미러를 보듯 글자를 힐끗 쳐다보고, 한 문장에 조명을 비추며 그 불온한 무리들을 한 문단씩 블록처럼 쌓아 올려 4천 자 목표에 기어코 도달하고야 만다.


아마도 그 4 천자라는 글자들의 모음은 어떤 완결된 목적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마치 나는 소중한 정보를 은닉이라도 하는 보안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불안한 자세로 글을 쓰지만 이 글자들은 4 천자라는 제한된 범위를 초월한다. 말하자면 이 글은 4 천자라는 목표에 포함될 정도로 정보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가, 왜 이러한 글을 쓰겠다고 마음이 발화한 것인지 그때 무심코 지나가버린 생각을 길어 올려 보지만, 애써봐도 이미 지나쳐온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절망하고 그 무렵의 모든 생각의 절편들을 무의미의 서랍 속에 넣어버린다.


이 글은 형태도 없고 미래에도 완결되지 못할 테지만, 시작했으니 그 여정을 어디선가 끝맺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중간 어디쯤에선가 열차에서 뛰어내리듯 어떤 결단에 나서야 할지도. 그렇지만 나는 그런 긴박한 결정을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늘 시작점에서 종결점까지 평탄한 여행을 즐기는 인간이었으니까.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버린 풍경을 점, 선을 면을 이루는 2차원의 형태로 사유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엔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설사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느냐, 누가 이 글의 소유주냐고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이 따위 글을 생산한 기억을 이미 잃어버렸고 그저 어느 순간 찾아온 생각을 즉흥적으로 글자로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일뿐, 다른 사실은 주장할 객관적인 논리는 부족하다.


나는 아마도 하얀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내일 혹은 모레쯤이 될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생각은 나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모든 조항에 동의하고 싶지 않아도 불가항력적으로 동의해야 한다는 분위기에 이끌린 나머지, 그 일은 내가 소원했던 일이며, 나 스스로 원했던 일이라고 나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나는 거짓말처럼 그 조건에 넘어가서 하루 4천 자 완성이라는 명제를 만든 것이다.


물론 그 4 천자라는 글자가 가진 의미는 대단한 분량의 규모를 표상하지 않는다. 단지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4 천자라는 괴물을 내 머릿속에 각인시킬 뿐이다. 매일 4 천자씩 써야 한다는 명령에 따라 100일을 인내하면 계약이라는 저주에서 풀려날 것이리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몰아붙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무게를 견디며 그 무게감을 버리기 위해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지만, 결국 그 무게에 짓눌려 자백을 선택한다. 나 역시 매일 4천 자라는 글의 짐을 짊어지고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어가지만, 그 끝에 자유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내일모레 출판 계약서를 쓰게 됐다는 사실을 이렇게 에둘러서 포장하게 되네요. 10월 정도에 새로운 책이 한 권 나오게 될 텐데, 어떤 책이 매일 4천 자를 쓰는 고통가운데 무엇이 태어날지 기대해 주시면 좋겠지만, 그런 건 강요할 수 없으니 이렇게 아주 가끔 가공된 형태로서 책이 완성되는 과정을 알려드릴 순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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