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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09. 2024

1차원적인 상상력을 넘어서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을 읽고



 '읽고 쓰고 표현하기'의 감각을 글로 남기는 공간입니다.

※ 스포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아래는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1장, 약 10페이지의 내용을 나름 재구성한 것이다. 3차원인 공간에 비해 왜 시간이 1차원만 존재하는가, 그 부분에 대한 시간여행자의 접근이 흥미로웠다. 시간여행자와 심리학자의 다툼을 엿보자. 대화에 내가 좋아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홍차와 마들렌 에피소드를 끼워 넣었다.


시간여행자: 학교에서 배운 기하학은 출발이 잘못됐어요. 점, 선, 면 이런 것들은 수학적인 환상에 불과해요. 추상적 개념일 뿐이니까요. 또한 길이와 너비와 두께만 가진 정육면체 역시 존재할 수 없어요.

심리학자: 무슨 소리야? 현실에 존재하는 물체는 모두 여기에 존재하고 있잖아. 여기 탁자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고!

시간여행자: 그럼 순간적인 정육면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잠시도 지속되지 않는 정육면체가 존재하냐 이 말입니다.

시간여행자: 실제로 존재하는 입체는 네 방향으로 연장된 부분을 가져야 합니다. 네 방향이란 길이와 너비와 두께 그리고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네 가지 차원이 존재하는 거죠. 네 번째 차원이 바로 시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적 한계 때문에 공간을 3차원적으로 인식하는 척하죠. 시간을 차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의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간이라는 네 번째 차원을 따라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기만 합니다. 사차원은 시간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일 뿐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시간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 빼고 나머지 공간의 세 가지 차원과 차이가 없어요. 과학자들은 시간도 공간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심리학자: 시간이 공간의 네 번째 차원일뿐이라면 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다른 것으로 취급하지? 공간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시간은 왜 불가능하냐고?

시간여행자: 공간 속에서도 사실 자유롭지 않습니다. 두 개의 차원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중력 때문에 우리는 제한을 받습니다.

심리학자: 그렇지 않아! 기구를 타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잖아. 게다가 시간 속에서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고. 절대로 현재에서 벗어날 수 없어!

시간여행자: 그게 선생님의 잘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서 계속 벗어나고 있어요. 우리의 영혼은 시간이라는 차원을 따라 나아가고 있어요.

심리학자: 그래도 결국 공간에서는 움직일 수 있지만 시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고!

시간여행자: 선생님은 틀렸어요. 내가 어떤 사건을 아주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면,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으로 돌아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장면을 봅시다. 마르셀은 어느 날 어머니가 차려준 홍차와 마들렌을 접하게 되죠. 그런데 홍차와 마들렌 덕분에 과거의 생생한 시간으로 돌아가게 되죠. 비의지적인 기억이라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어릴 적 레오니 아줌마와의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기억은 비의적으로 우리를 과거로 여행하게 만들 수 있어요. 결국 우리는 원한다면 시간이라는 차원을 따라 이동할 수 있어요.

심리학자: 그건 좀 이치에 맞지 않아.

시간여행자: 그래서 제가 어떤 기계를 만들게 됐습니다.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기계지요.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합니다.

시간여행자: 제가 증거를 곧 보여드리죠.

《타임머신》1장, 약 10페이지 각색



공간은 3차원인데, 시간은 왜 1차원일까?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대칭적인 구조라는데, 시간은 덜떨어진 바보 같다. 만약, 시간이 3차원이라면,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깊이와 너비와 높이로 연장(extension)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의미하는 복잡성이 무엇인지 영 와닿지 않는다. 시간이 아니라 내가 덜떨어진 걸까?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과 시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서 ‘시공간’이라고 취급했다. 시간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원리에 따라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이다. 만약 시간이 3차원으로 그러니까 다차원으로 흐르게 되면 시스템의 무질서가 지나치게 증가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 1차원의 시간에서 사는 것이 최적화된 인간이니까.


위의 시간여행자의 논리처럼, 비의지적 기억으로 어떤 시간으로 기억이 이동한다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것인지는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의식이 대뇌피질에 기억된 흔적을 들춰낸 것에 불과할 테니까. 의식은 어느 순간이든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진정한 타임머신의 구현이 가능하겠지. 발명한 사람은 연락을 달라.


《타임머신》은 시간여행자의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이 기계는 과거든 미래든 어느 시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 먼 미래로 여행을 떠난 주인공은 인류가 두 개의 종으로 진화한 것을 발견한다. 지구 표면에서 오직 평화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엘로이와 지하에서 살아가며 엘로이를 식량으로 삼아 살아가는 몰록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먼 과거로 여행하는 체험을 했다. 어떤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됐을까. MBC에서《타임머신》을 원작으로 한 <The Time Machine>을 방영했다. 조지 팔이 감독하고 데이비드 던컨이 각본을 쓴 이 영화는 초딩에게 실로 충격적이었는데, 마지막 장면이 특히 그랬다.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엔 그 장면이 늘 따라다닌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악마인 몰록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타임머신에 오른다. 몰록은 주인공의 탈출을 막으려고 기계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타임머신은 광속으로 미래로 치닫게 되고 몰록은 그에 따라 급속히 나이를 먹게 되는데, 마치 수백 년이 몇 초 안에 지나가는 듯하다. 몰록의 피부는 주름지다, 점점 더 얇아지고 검붉게 변하다 혈관이고 피부고 뭐고 으스러지고 만다. 눈동자는 움푹 패고 입술은 마른 호수 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피부는 낡은 휴지 조각처럼 떨어져 나간다. 몰록의 앙상한 뼈가 드러나고 체구는 점차 줄어든다. 얼굴과 몸 전체는 완연히 해골로 변해가고 가루로 으스러지고 만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몰록을 파괴하고 만 것이다.


소설 《타임머신》은 타임머신을 다룬다. 타임머신의 과학적 원리에 대해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소설의 목적이 교양을 쌓으려는 게 아니니 딱히 문제없다. 그래도 H.G 웰스의 과학적 지식은 짧게나마 소설 초반부에서 엿볼 수 있다. H.G 웰스는 런던의 노멀 스클 오브 사이언스에서 생물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저명한 생물학자인 T.H 헉슬리가 그의 스승이었다. T.H 헉슬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한 옹호자였다. 나중에 저널리스트가 된  H.G 웰스는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과학의 발전이 미래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엘로이가 살아가는 유토피아적 미래


이 소설은 과학 소설도 SF 소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인류에게 찾아올 의미에 더 초점을 맞췄다. 웰스는 시간이 선형적이고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전제에 도전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진리든 본질이든 웰스는 그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의문이 소설을 생산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스테레오 타입에 경고를 내미는 것일 수도 있다. 한쪽에 편향된 채 경직된 사고에 함몰된 현대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건 아닐까. 시간 여행은 어떤 면에서 기회가 된다. 미래가 디스토피아가 될지, 유토피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만약 디스토피아라면 우리는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 현재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반성적 성찰을 하는 게 인간만의 고유 특성이 아닌가.


몰록이 살아가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미래의 새로운 인류인 엘로이와 몰록은 당시 영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비유한다. 엘로이는 상류 계급, 몰록은 노동자 계급을 상징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상적인 엘로이의 삶은 유토피아에 가깝다. 반면 엘로이는 지상에서 부유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몰록은 지하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 빛과 멀어진다는 것은 디스토피아적인 삶을 의미한다. 그 대신의 엘로이는 몰록에게 자신의 종족을 먹이로 공급한다. 웰스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위협을 소설의 엘로이와 몰록의 묘사로 대신한다.


시간 여행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지구의 몰락을 찾아 떠난다. 태양이 지구를 덮치기 직전이다. 지구의 최종 운명을 음산하게 상징한다.


소설 《타임머신》에서는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개념으로 본다. 1차원적인 상상력을 뚫고 넘어서 시간 자체를 재배치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소설처럼 시간을 능가하고 시간 밖에서 시간을 관할할 수 있을까.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 우리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오직 신만이 시간을 초월한 존재라서 영원하다'라고 말했다.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과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신에게는 이전과 이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 흐르는 게 아니라 신은 시간을 보고 있다! 그런데 신은 누가 창조했단 말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묻는다.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으면 알지만,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모드는 것이 되고 맙니다.’라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양자 역학에서 양자를 관찰하면 볼 수 있지만 관측하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불확정성의 원리와 똑같은 말이 아닌가.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가고 있다는 것만 얼핏 안다. 그것은 우주의 기본 질서인 엔트로피의 원리처럼 일직선으로 흐른다는 것을 안다. 시간을 사유하는 것이 대체 어떤 이득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 의식이 시간에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시간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는 추측을 할 뿐이다.


시간을 생각하면 시간 여행이 떠오르지만, 과학적으로 엔트로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려는 나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지금도 시간에서 벗어나려고 발악하고 있지 않은가.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식물처럼 광합성을 하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호흡을 하고 있고, 몸에 쌓인 노폐물인 땀과 장에 쌓인 폐기물을 정기적으로 바깥에 배출한다. 생명이 생명으로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엔트로피의 증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엔트로피의 증가에서 도망칠 수 없으니까. 


산다는 것, 열심히 숨을 쉬고 때로는 어떤 수단으로든 사람과 생각을 나누고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엔트로피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시간의 질서에서 잠시 탈출하는 길이다. 그럼에도 엔트로피의 증가를 억누를 수는 없다. 모두가 결국은 엔트로피의 파국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2.

긴 이야기를 토해내고 나니 시간이 오전에서 오후로 바뀌어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미래로 건너온 느낌이다. 거의 5천 자에 육박하는 글을 누가 읽어줄까 싶다. 내가 쓴 글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대필해준 건 아닐까. 원고 쓰기도 바쁜데, 회사 일도 스택처럼 쌓여있는데, 대체 나는 무엇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사실은 안다. 글을 쓰기 때문에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것이다. 쓰는 근육을 쓰니 글을 쓸 의지도 생기는 것이다. 마치 엉뚱한 순환논리에 빠진 기분인데, 아무튼 그렇다. 써야 쓸 여력도 주제도 찾을 수 있으니까. 자꾸만 뇌를 건드려야 오래 살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이것은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마치,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모든 미래가 달려있다는 듯이 읽은 것을 글로 표현한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다. 굳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미래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구경하고 싶지도 않다.



아래 링크에서는 소설 《타임머신》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특히 "Time Flies" 는 엘로이들의 세계를 묘사했다.

Awkward Dinner Party: original music inspired by H.G. Wells' The Time Machine | The Bushwick Book Club Seattle (bandca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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