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05. 2018

'팔자'와 '운명'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

 ‘운명’이란 ‘인간과 세상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초인간적인 힘’을 가진 존재는 누구일까? 인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주를 초월하는 무한한 존재, 절대적 가치를 넘어서는 상상 너머의 존재, 그 본질이 가진 힘의 원리가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인간에게는 허무가 찾아오니 인간으로서 어찌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왜 우주를 창조했고 미미한 인간의 운명까지 통제할까? 운명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내 생각인가? 신의 계획된 의도인가? 어느 생각이 맞는지 인간은 모른다. 다만, 매 순간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자유로운 의지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게 의존하며 사는 것은 공허한 마음을 주기 때문이다. 설사 운명이 큰 틀에서는 계획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세부적인 모양은 스스로 조각하며 살아가는 게 맞다고 믿는다.


 ‘운명’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이라고 한다면, ‘팔자’는 ‘사람의 한평생의 운수’를 설명한다. 내 뜻대로 삶이 돌아가지 않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삶이 진흙탕처럼 질척거리기만 할 때, 우리는 ‘팔자가 사납다’고 한다. 



 ‘팔자’八字, 이 글자에는 ‘8개의 글자’가 들어 있다. 사람이 태어난 해, 달, 시간, 날을 간지로 나타내면 여덟 글자가 되고, 그 속에 인간의 운명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팔자는 운명과 달리 부정적인 뜻이 강하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졸지에 거리에 나앉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팔자가 기구하다.”, “팔자가 사납다.”처럼 주로 나쁜 결과를 두고 이 단어를 쓴다.


 삶은 정말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수학 문제다. 쉽게 풀릴 것 같으면서도 자꾸 꼬이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내 팔자가 사납다고 신세한탄을 한다. 그런데, 사나운 팔자조차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삶의 관점이 달라지듯, 팔자를 좋게 고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고 한다. “팔자 고친다.”는 관용구도 있지 않은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수많은 낮과 밤이 이어진 것이 세월이다. 풀기 어려운 숙제와 사투하느라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날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괴로운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자책하고 있는다. 자신의 팔자가 기구하다고 세상 탓만 할 게 아니다. 팔자는 기구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달라지는 거다. 운명은 개척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분명 보여준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마다 팔자 탓을 탓하고 쓰러지는 것보다, 운명에 한 발짝 다가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산다. 불안에 휩싸여 삶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가야 한다.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운명의 초법칙≫이라는 책에서 미래가 불안하고 삶이 암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다. 미래를 희망하려면 오히려 원하는 희망이 달성하지 않을 순간을 상상하며 위험에 대비하라고 한다. 실패의 순간을 상상하면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본능들이 깨어난다고 말한다. 



 얼마 전 고객에게 신제품을 시연했다. 시연 전, 운명의 초법칙을 생각하며 잘못된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팀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시연에 실패하여 좌절하는 광경을 상상하며 꼭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과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속출했다. 적당한 긴장감과 위기의식은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팀은 하나로 뭉쳤고 원하는 결과도 얻었으며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운명의 초법칙≫의 핵심은 미래를 두려워 벌벌 떨기만 하는 것보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되 그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하면 안 좋은 상황이 닥쳐도 난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단순한 긍정으로 희망을 세뇌시키는 것보다, 부정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방식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묘하게 어우러지는 조합이었다.


 인생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걸까? 사주팔자가 정해져 있느냐는 어느 공시생의 질문에 법륜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일은 자신이 마음먹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에 따라 사물을 왜곡시켜서 보기도 하는데, 똑같은 대상을 놓고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다.”라는 얘기였다. 



 삶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질 확률도 그만큼 같이 올라간다. 그 과정에는 가끔 우연이라는 요소가 작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운’이다. 운은 삶의 변칙적인 요소다. 그 운이란 것이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놓치지 않고 휘어잡으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의 지혜가 아닐까? 그렇지만 지혜란 것은 쉽게 길러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축적된 지식이 정제되고 재조합될 때 나타나는 것이 지혜인 셈이다. 


 지금 팔자가 안 좋다고 실망하지 말자. 우리에게도 언젠가 운이 찾아와 미소를 지어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실패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먼저다. 그러면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일어나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고, 어떤 위기든지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과거처럼 팔자가 만든 불행을 탓하며 살거나, 부질없이 그것을 되씹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각오가 더 중요한 순간이다.

이전 09화 생각하는 '명사형' 인간, 행동하는 '동사형' 인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