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29. 2020

파도가 내 가슴을 치네요.

어느 해 가을의 기억

바다는 나에게 늘 어둡고 멀기만 한 존재다. 닿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으니, 생각이라도 간절하게 먹고 상상 속으로 뛰어들어 본다. 그러니까 수평선 너머를 앞 배경으로, 모래를 밟고 선 남자를 주인공으로, 몽상이라도 즐긴다. 공상에 잠길 때마다 에메랄드빛 바다 앞에서는 기다랗고 색이 바랜 벤치 하나가 나를 기다린다. 그곳에선 나는 시를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상상 너머에서 나는 벤치 모서리에 자리를 잡는다. 등을 살짝 기대고는 시야를 바다 쪽으로 펼친다. 볼펜을 꺼내고 낡은 노트를 뒤적거리며 쓸만한 문장을 찾으려 애쓴다. 그러다 보면 기대고 싶은 단어 몇 개를 찾아낼 것이다. 나는 그 단어들을 초청하고 반기고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이별을 맛본다. 순간, 고독이 찾아와 위로를 건네지만, 이 불완전한 세계는 곧 닫혀야 할 운명에 처한다. 고개를 숙이고 나는 살아야 할 것들과 살 수 없는 것들을 솎아 내려는 태도를 취한다. 눈을 감고 사라져 갈 모든 추상적 관념들에게 어떤 말을 남겨야 할지 고민에 휩싸이면 고독은 방황을 끝낸다.


나이를 먹을수록 상상과 현실은 서로 평행선을 달린다. 더욱더 멀어져 가는 꿈같은 것들은 마치 찾을 수 없는 바다 너머의 미스터리처럼 벽으로 진화한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고 다시 현실을 돌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이해 못할 허기에 도취되다, 온몸에서 물기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무위의 세계에서 굳어간다. 그렇다, 바다는 꿈같은 것이다. 현실이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정을 내리는 순간 비참하게 깨져버리는.


작은 목소리로 티켓을 한 장 달라며 카드를 불쑥 내밀었다. 바다를 볼 수 있다면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판매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 무관심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표 한 장을 내밀었다. 강릉이에요. 서울에서라면 가깝고도 먼 곳이네요. 묘한 말이었다. 나는 주의 깊게 표를 살펴보다, 판매원에게 눈인사를 건네곤 자리를 떴다. 3번, 내가 기다려야 할 위치를 가리켰다. 평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즐비했다. 나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터미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20분은 여유를 부려도 될듯했다.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빈 의자에 몸을 걸쳤다. 알 수 없는 음악이 흘러들었지만 내 귀에는 여백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입에 축였다. 따뜻한 기운이 부산스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식혔다. 그 순간은 어떤 생각도 방문하지 않았다. 바다를 향한 동경도, 늦가을을 상징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서늘한 길거리의 풍경조차.



버스는 두 어 시간을 꾸준하게 달렸다. 고속도로는 언제나 그랬듯 정체와 풀림을 반복했고 버스 내부는 가을 덕분인지 소란스러운 사람들로 가득했다. 바다를 상상하던 순간처럼 나는 노트를 꺼내곤 무엇이라도 떠오르는 것을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는 내내 지근지근 아팠다. 서울에 두고 온 의무, 어떤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이 유난을 떨었다. 두 시간을 달리고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실감하고도 나는 질서를 여전히 무너뜨리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뿐.


감사하게도 바다는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크게 쉬고 그제야 주위를 돌아봤다. 갈매기는 낮게 날아다니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따금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스러운 순간을 상상하곤 하는데, 마침내 시야 앞에서는 그런 광경이 펼쳐졌다. 내가 다니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면, 어쩌면 타인이 아닌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건 아닐지. 기묘한 상상은 끝이 없었다. 이 넓은 바다를 독차지한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오직 나 혼자뿐이라면 이 넓은 행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욕심에 구멍이 뚫렸다. 눈앞에 펼쳐진 푸르기만 한, 바다 앞에서는 고독조차 스르르 풀려나는 걸까.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겸손해질 수 있다면, 이 바다와 더 많은 밤을 보낼 수 있으리라.


나는 상상했던 장면을 현실로 당겨왔다. 벤치에 앉아 끄적거리던 몇 가지 말들을 되짚다, 바다를 멀리해라, 자유는 멀어, 와 같은 무용한 말들이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를 털고 바다 가까이 다가섰다. 발목 부근에서 물이 찰랑거리면 잠시 뒤로 물러섰다, 다시 앞으로 이동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촉감이 가슴속에서 헤엄을 치려 했다. 어찌 나는 작은 물결에 이리도 쉽게 흔들리려 하는가. 바다를 앞에 두고 출정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단단한 단어를 찾으려 하는 나, 자신감 없는 단어에 굴복하는 나, 두 자화상이 보였다.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다가서지 못하는 존재, 나약한 인간은 바다를 외면한 채 걸었다. 옆으로 옆으로 멈추지 못하니 비겁하게 걸었다. 얼마나 걸으면 파도는 다시 잔잔해질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에서 힘을 놓으면 그 속엔 자유가 숨어 있을까? 아니 펼 용기는 있을까? 무엇이 두려워 자애로운 바다를 앞에 두고 서도 나는 모든 걸 한꺼번에 차지하려는 사람처럼 욕심을 내는가. 파도는 저 바다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가슴 어딘가에서 밀려드는 파도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전 07화 모방이 저의 재능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