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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26. 2020

방향 없고 가치 없는 것들에 빠져들고 싶다

목적 없는 글

나이를 먹어도 연차가 쌓여도 여전히 코딩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 멈추지 않는지 물어보면 조금 머뭇거리다, 집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래, 나는 반백이지만, 백수가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두자. 반백이나 먹고, 여태껏 개발 툴 열어놓고 열 코딩 중이다. 코딩이란 게 재미있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재미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쏭달쏭하다. 재미가 없으면 어떠랴, 먹고사는 일과 결부되어 있으니 그냥 뛰어드는 수밖에, 그러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먹고사느라 배운 게 이거밖에 없어서, 힘으로 하는 일은 영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냥 할 뿐이라고.


1,500원짜리 커피를 한 잔 받아 들고 책상에 앉아서 한동안 묵언수행, 아니 멍 때림을 유지하고 싶다. 이놈의 노트북, 부팅 시간은 왜 이리 빠른가. 486 컴퓨터를 쓰던 시절이 그립다. 그 시대의 느림이, 그 저속의 느낌으로 돌아가고 싶다. 쓸데없이 빠르기만 하니까 자꾸만 가속에 가속을 덧붙이는 속도에 놀라고 만다. “우와! 진짜 대단한 걸!” 모든 게 완벽하다. 언제든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부연 설명이 따로 필요 없잖은가. 거추장스러운, 이를테면 예열 따위는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환경이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다. 


커피 한 모금을 쭈욱 빨아올리면, 스트로크 밑바닥에서 출발한 커피 분자들이 혀를 적시고 다시 그 물결이 기도를 지나 위장까지 닿을 때쯤, 나는 비로소 일을 생각한다. "일, 그래 나는 일을 해야 한다. 난 직장인이었어." 가끔 이유 없이 그 존재를 망각하고 말지만, 이 절대적인 신분의 껍데기는 나에겐 갑옷처럼 여전하니까.


집중을 하려고 발악을 해도, 일을 하는 게 내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떨어져 나간 오십 번째, 이름도 정의되지 않은 그저 그런 말썽 많던 바퀴 따위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몸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옆길로 외딴길로 방황을 떠나버린, 모난 바퀴 신세더라도 가끔은 본 궤도에 정착할 거라는 근거 없는 맹신에 붙들리는 편이다. 설사 내가 믿는 것이 그릇된다 할지라도, 똑바로 가고 있다는 신념에 더 강하게 붙들리고 싶으니까. 그래야 생존이 가능하니까. 그것이야말로 나에겐 종교다.


나는 개발에 손을 떼지 못하고 있으므로 여전히 실무자인 셈이다. 그러니까 나는 회의실 책상 정가운데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허리를 45도쯤 뒤로 기대서 손가락이나 까닥 대거나 근엄한 목소리로 거들먹거리는, 나이 지긋한 꼰대 따위는 아니라는 이야기. 그리하여 라테는 말이야, 라는 말을 입에 대고 살지 않아도 되는, 조금은 젊어진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살아도 되는 사람일지도.


왼손엔 1,5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반대편 손엔 1,500원짜리 마스크, 그리고 모니터엔 코딩을 위한 개발 툴과 온갖 형상의 프로그램이 다른 색깔로 반짝인다. 나는 눈이 부셔서 그만 모니터를 끄고 싶지만, 생존의 본능을 억누를 수 없어서 그만 그 용기를 포기한다. 그 순간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기분이 찾아온다. 그리하여 다시 잠들었으면, 하염없이 게으름에 취해,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나태함에게 지배를 당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어떤 규칙적인 질서에 따라 배치된다. 그 질서는 너무나 엄숙하고 정연하지만, 때로 따분하다. 따분하기 때문에 나는 자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자유의 의미를 모른다. 나는 자유를 늘 가슴에 품고 다니므로 꿈을 잃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 있는 건가. 그러니까 나는 질서에서 벗어나, 불규칙한 것들을 추종하는 사람인 셈이다. 


이를 테면, 버스 터미널에서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아무 곳이나 향하는 표 한 장을 달라고 부끄럽게 말해보는 것, 출근하는 길에 햇살이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그 기분에 취해 창가에  앉아 바깥세상을 물끄러미 구경하는 것, 일이 전부인 공간이지만 그곳을 벗어나 카페 한 구석에 앉아 커피를 흡입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상상해보는 것, 나는 이런 방향 없고 가치 없는 것들에 연속적으로 빠져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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