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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20. 2019

낯선 행복의 수집

바르셀로나 어디쯤에서

누군가 정해 놓은 길, 말없이 따라다니기만 하는 일방적인 흐름에서 그만 뛰쳐나오고 싶었어. 인터넷 연결을 잠시 꺼 두고 다운로드한 지도 데이터에 몸을 맡겼지. 흐트러진 질서가 정돈되기 시작하더라. 보이지 않던 하늘이 나타났고 어둡던 길이 열렸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우린 위험을 경배하는 여행자의 길을 고집한 거야. 도시의 높은 망루로부터 차단당하기 위해.


어떤 분명한 목적도 방향도 없었어. 맛집을 찾아야 한다는 아집도, 최저가의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전략도, 그 어떠한 방향성도 가지지 않았어. 단지 바르셀로나의 더 내부로, 삶의 중심부를 향해야 한다는 다짐만 존재할 뿐이었지. 더 많은 상실, 더 많은 고독, 더 많은 탐험이 손을 잡았지만.


마음이 문득 녹아버린 듯했어. 흐르고 흘러서 발목까지 감싸 안은 거야. 따뜻하고 고요했지. 발을 내디디면 따뜻한 공기가 바닥에 촉촉하게 흘렀어. 하나의 안정된 촉감, 둘의 포근한 전율, 셋은 없어도 되는, 그래서 충분한 혹은 부족함, 가득한 비밀스러움. 이런 것들에 진심으로 다가서게 되면 나는 불순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도 되는 거야.


2월의 햇살은 유난스럽게 우리를 반겼어. 우리는 들뜬 시간에서 벗어나 소강상태를 즐겼지. 의식도 없이 몇 시간을 헤매도 되는 자유를 어깨에 걸치고 햇살의 인사를 오래 받았어. 사는 것은 이토록 사치스러워도 되는 일일까? 나는 이렇게 오래도록 정지해도 되는 걸까? 바쁨을 잊고 자유 하나만을 믿고 바닥에서 미끈거려도 되는 일일까. 


츄러스 가게 앞에 한국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어. 그들은 한 가지 목적을 가졌어. 옆엔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의 손을 잡았고, 그들의 미소는 반짝거렸지. 츄러스를 파는 아저씨는 부산스러웠지만 한국말을 꽤 유창스럽게 했어. 가게 앞엔 한국어로 쓰인 가격표가 자랑스럽게 펼쳐졌고. 우리도 가격을 확인하고 늘어선 줄에 동참했어. 분명한 것은 그 순간에 삶의 목적을 찾았다는 사실이야. 잠시 인간으로서의 신분을 되찾은 묘한 기분. 굉장한 놀람.


츄러스를 한 입 가득 물고, 우린 또 배회를 시작했어. 낯선 길의 연속, 전혀 통일되지 않은 어떤 흐트러짐에 우린 감탄사를 남발하며. 어디인지도 모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확인도 되지 않을 순간에 우린 골목 모퉁이에 다다랐던 거야.



오래되어 보이는, 오직 그곳만이 꼭 간직해야만 하는, 특별한 비밀 하나쯤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아니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상점을 하나 발견했어. 비밀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세상 끝의 문을 슬쩍 밀었지. 녹슨 소리가 났고 관절이 어긋나는 소리가 간혹 들렸어. 물건을 파는 곳인지 박물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나는 탐험자가 되어야 했어. 


낡은 진열대 끝엔 머리가 허옇게 탈색된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어. 할머니는 내가 무엇을 하든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쪽저쪽을 편안하게 서성이거나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만 해도 그곳에선 무엇이든지 허용되었어.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아주 우연히 찾아간 이곳을 꼭 보관해야겠다는, 기억 하나에 의지하기에는 그 순간이 너무 벅찼으므로. 아마도 어떤 물건을 하나 샀던 것으로 기억해. 파란색과 초록색 가끔 빨간색으로 치장된 자동차 혹은 복엽기 같은 거 말이야. 한 손에 들기에 충분했지만 정성스러운 디테일과 비교하니 나는 꽤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 얼마인지 물어보기에 왠지 부끄러운, 이것을 내가 가져도 되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만 했어. 할머니는 영어를 못했고 나는 스페인 말을 할 줄 몰랐던 거야.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다 지폐 몇 장을 건넸고 할머니는 누런 종이로 말없이 물건을 둘둘 말았어. 얼마를 건네더라도 문제없는, 말이 필요 없는 순간.


여행이란 무엇일까. 우린 계획되지 않으면 불안하지만, 계획이 없으므로 안도할지도 몰라. 나는 계획에 약점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 열심히 대비하여도 미래는 거의 어긋나는 편이야. 스페인, 바르셀로나 내가 살지 않던 곳에서 비로소 나는 계획에서 멀찌기 떨어질 수 있었어. 삶이 길게 이어져도 2월의 충만함이 유지될까. 열심히 목표한 대로 산다면 우린 더 행복해질까. 그래서 얼마나 벌어들이고 있어? 돈이 아닌, 돈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당신만의 기억들. 당신은 낯선 행복들을 얼마나 수집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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