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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23. 2019

하나의 세계가 종말하는 일

삶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남한산성에 오른 적이 있어.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고 숨이 심하게 찼고 다리가 무진장 후들거렸지. 죽을 고비를 다섯 번은 넘겼을까? 정상에 오르니 서울인지 경기도 부근인지 알 수 없는 도시가 한눈에 펼쳐졌던 거야. 화각이 모자란 카메라가 아쉬웠지만 도시의 질서를 눈에 가득히 담는 것만으로도 감응을 느꼈지.


지구는 평균적으로 7천 만년에 한 번씩 외계의 침입(?)을 받아 멸망을 반복했대. 현재 사피엔스가 문명을 구축한지 채 만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라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수치로만 접근할 뿐이지만. 지구가 겪은 멸망의 흔적은 곳곳에 패인 상처로 남아있지. 크고 작은 외계로부터 날아온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의 생명을 멸종시킨 원인이었는데, 번성했던 공룡의 멸망이 최근(?) 6천5백만 년 전에 발생했다고 하니, 다시 대격변에 가까워졌음을 설명하는 게 아닐까?


소행성은 지름의 길이에 따라 지구에 자신의 몇십 배에 달하는 분화구를 남겨.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지름 40km 이상을 차지하는 굉장히 큰 분화구 형태였어. 언제였을지 짐작할 수 없지만, 소행성의 공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어. 연구에 의하면 지구에서 시작된 생명체의 기원은 소행성의 충돌설이 높다고 하니, 소행성의 충돌은 생명을 탄생시키기도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 거야. 생명의 시작과 끝을 소행성이 담당한 셈이니 지구로서는 외부의 힘에 기댄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 나중에 뒤통수를 칠지언정 현재는 소행성에게 고맙네. 


우리가 늘 외면하는 죽음, 우리는 모두 죽음을 겪지 못했지만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히 인식하지. 플라톤이 언급한 대로 두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본질이 아닌 그림자에 불과할지도 모르잖아. 존재한다는 사실, 볼 수는 없어도, 경험하지 못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죽음은 때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반대편엔 이데아라는 죽음을 초월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소행성이 남긴 분화구는 죽음의 그림자이지만, 역설적으로 생명의 시작이라는 저 너머의 이데아의 실재를 증명할지도.


우리는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 질지 알지 못해.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며 한 세계의 몰락을 간접적으로 느낄 뿐이야. 당사자는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될까? 종교가 있다면 믿음 또는 죄의 경중에 따라 사후에 어떤 벌을 받게 될까? 악인은 처벌을 받고 선인은 선물을 받을까? 모두 인간의 추측일 뿐이야. 과학적인 통계 데이터로 검증될 수도 없으니 나는 모든 종교의 범주를 믿지 않아. 궤변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니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칙한 상상을 할 수도 있지. 언제 죽음을 겪게 될지 예상할 수 없으니 죽음이란 인간이 창조해낸 가설이라고 차라리 믿어 버리는 거야.


엉뚱한 생각을 했어. 죽음은 소행성이 충돌한 결과이며 우리는 언젠가 모두 외계에서 날아오는 힘에 의해 격변을 맞을 거라는 것, 그 순간은 짧고도 길 거야. 하지만 죽음의 순간은 인간의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찰나에 불과하다는 거야. 우주와 인간의 시간은 늘 상대적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사는 거야. 죽음이 내 것이 아니라고 믿으며.


인간의 죽음이란 하나의 세계가 종말 하는 것을 뜻해. 우리는 저마다의 분화구 경계 내부에서 안전함을 누린다. 바깥세상으로 도전할 필요도 없어. 그림자의 세상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야. 그 문제가 우리를 도전하지 않도록 방치하는 거지.


백 년을 살지 못하는 우린 죽음이 멀기만 할 거라 믿어. 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죽음은 찾아올 거야. 우리의 생명은 단 1초 만에 붕괴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차라리 죽음을 외면하고 사는 게 편할까?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어. 그래서 비밀도 아닌 이야기에 숨죽이고 사니까 인생이 그렇게 공허한 가봐. 대신 이렇게 글이라도 남기는데,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에 항거하는 일일까? 


15년 전 산 정상에서 나는 기괴한 질문을 던졌지만, 해답을 얻지 못했고 현재 역시 가능성에도 근접하지 못했어. 가끔 삶의 끝이 어디일까 생각하곤 마무리하지 못한 목록을 점검할 뿐이지. 죽음을 인정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사는 게 산자의 역할일지도 몰라. 내 삶에 분화구라는 붕괴가 일어나는 지점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으니 말이야. 물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너와 나 모두 비켜나갈 수 없다는 명제 하나는 분명해. 그 이유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만들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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