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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y 15. 2016

청춘뻔뻔

청춘,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요즘 들어 사고의 외연이 넓어진 건지, 사는 게 막막한 건지, 여러 생각들을 흡수하게 된다.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밀물 썰물처럼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요 며칠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엉망일까'라는 생각을 안고 살았다. 속 시원하게 내린 결정이 때늦은 후회를 불러오고, 내 나름의 결단이 사실은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중2병 걸린 아이처럼 다시 또 그 질문으로 돌아간다. '나 왜 살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잠시 빼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내 인생이 엉망이라고 생각하지? 왜 끝나지 않은 삶을 판단하지?
인생이 엉망이라는 건 결국 내가 아닌 남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만 그런 거 아닌가?'


 내가 남들 다 하는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다고, 학교 성적이 변변치 못하다고,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엉망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 그대로 내 삶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취업 준비를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돈을 잘 벌기 위해, 친척들에게 '엄친딸' 소리를 듣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낳았지만 그들은 내 인생을 대신 살 수 없고, 내 인생은 나의 생각과 나의 선택, 나의 호흡으로 이루어지는 것일진대 왜 나는 내가 아닌 타인과 세상의 기준에 그리도 목을 매는가. 행복의 기준이 대체 언제부터 내 내면이 아닌 밖에 있었을까.


 살다 보면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대로 먹고사는 사람도 만날 수 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일궈낸 실력이라고는 볼 수 없는 타고난 외모, 부모의 자산, 호사스러운 배경으로 잘 먹고 떵떵거리는 사람들도 많이 본다. 그러나 후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쁜가? 아니, 절대 아니다. 누군가는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것 이상의 보상과 대접을 받으며 산다고 말하겠지만, 그들은 내가 이렇게 태어났듯이 그냥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누군가를 단지 '금수저'라는 이유로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외모와 배경 등을 불공정하게 악용한다면 문제가 될지 몰라도, 좋은 배경 자체로 그들을 미워하거나 싫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나 또한 능력이 아닌 운으로 이렇게 먹고살아도 '괜찮은 인생이다'라며 뻔뻔한 태도를 갖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대학 입학 후 한동안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한국에서 중고교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내신을 챙기지도, 수능을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지 2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수능과 입시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이 대학을 다닐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고민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당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잘 안다. 수없이 많은 기회와 운을 타고나 여기까지 온 나, 나는 그 기회를 얻었고 그들은 그 기회를 얻지 못한 대신 다른 기회를 잡았을 뿐이다. 여기까지 와서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나 자신을 비난하고 헐뜯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 나보다 노력도 더 하지 않으면서 날 때부터 타고난 배경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진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세상에는 깔리고 깔렸다. 누군가가 내게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걸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건, 반대로 나도 곧 누군가에게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걸 인식시켜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내게 찾아온 기회도, 운도, 모두 내 인생이다. 그것을 합당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가 내 한계를 인정하는 꼴이 될 뿐이다.


 나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발 한정 짓지 말자. 나이가 벌써 스물세 살이라 안될 것 같다고? 지금까지 살아온 날은 고작 이십여 년이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다. 내 에너지와 기력은 떨어질지언정 그만큼 좋아하는 일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오히려 더 많아질 것이다. 춤을 추고 싶으면 춤을 배우고, 작가가 되고 싶으면 글을 쓰고, 제작사 대표가 되고 싶으면 현장에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으면 그만이다. 지금까지 23년, 그거 대충 살았다고 해서 내 인생이 어디 낭떠러지로 추락하지 않는다.


 이 글은 지금도 심한 팔랑귀에 중심 없이 흔들리는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자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내 나이 또래 청춘들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다. 세상의 소음보다 내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는 청춘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 보면 '아, 나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애초에 잘 살고 못 산다는 건 누가 정하는가? 그 기준의 주인 역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삶의 기준이 행복하게 놀고 배불리 먹는 것이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좋은 삶의 기준이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듣는 것이라면 콘서트에 가고,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만나면서 행복해하면 된다. 커리어의 발전이 중요하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고, 가족의 행복이 중요하다면 화목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나의 삶을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잣대에, 기준에 맞추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설령 그것이 대다수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기준'이라 해도, 나에게 맞지 않는다면 그것을 굳이 따를 이유는 없다.


 누구 좋으라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매체에서는 자꾸만 살기 힘든 세상임을 강조한다. 청년실업률이 얼마나 높고, 기업의 구조조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광장에서는 어떤 시위가 벌어지고, 사람들은 어떤 논란에 휩쓸리는지 일주일에도 수십 가지의 사건 사고가 물밀듯 터져나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연극을 본 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내 감상을 정리하는 글을 써대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의 목소리와 가사에 심취한다. 문밖을 나섰을 때 쨍한 햇볕과 5월의 푸른 하늘에 환호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하루의 스트레스를 모조리 흘려보낸다. 세상이 얼마나 비극적으로 흘러가든 나의 중심, 내 안의 기쁨,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 모두가 죽는소리를 한다고 해서 나도 같이 죽는소리만 하다가 젊음을 허비할 수는 없다. 인문학강사 최진기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되 각자의 인생은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꿈 역시 마찬가지다. 온갖 미디어에서 멘토, 선생, 스승을 자처하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입과 글을 통해 '꿈을 가져라', '꿈을 좇아라', '포기하지 마라'라고 말하지만, 꿈이라는 건 누구나 다 마음속에 하나쯤 갖고 있어야 하는 '필수템'이 아니다. 그게 꿈이든 뭐든 간에, 설령 나만 빼고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괜찮으니까 제발 강박을 갖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꿈보다 더 중요한 건 여전히 나의 목소리이고, 내 안에서 공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들이 호소하는 '꿈의 존재'는 그저 청춘을 현혹하는 또 다른 언변에 지나지 않는다. 꿈이 있건 없건 내 뜻대로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사는 거고, 당장 내 삶이 위태로워도 끝까지 도전해야겠다 싶으면 누가 뭐래도 그렇게 사는 거다. 너는 왜 꿈이 없냐, 너는 왜 하필 그런 꿈을 꾸냐, 네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냐, 너는 안된다, 이렇게 갖은 방식으로 나를 종용하려는 목소리에 고개 빳빳이 들고 '피식-' 비웃어주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 누가 뭐라고 욕하든, 끈질기고 치열하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그것에만 몰입했으면 좋겠다.  


 단지 젊어서가 아니라, 각자의 행복을 끈질기게 추구해야 하는 우리이기 때문에.

청춘,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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